김예나
| 2026-09-29 22:30:00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 저승에서 생전에 저지른 죄, 즉 업보(業報)를 심판받는다고 여겼다.
사후 7일이 되는 날 마주하는 진광왕을 시작으로 초강왕, 송제왕, 오관왕, 염라왕, 변성왕 등 총 10명에 이르는 '지옥의 왕'을 만나는 것이다.
죄의 경중에 따라 온몸에 쇠 못질을 당하고, 남을 험담하거나 헐뜯은 대가로 혀가 뽑히기도 한다. 펄펄 끓는 솥에 넣는 무시무시한 형벌도 있다.
엄숙하게 재판을 주관하는 시왕(十王)과 우락부락하게 생긴 옥졸, 처참한 지옥의 모습은 화폭에 담겨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따끔한' 충고를 전해왔다.
죽음 너머의 세계를 생생하게 담은 700년 전 그림이 한자리에 모인다. 오래전 흩어져 한국과 미국, 일본에 머물렀던 시왕의 만남이다.
29일 문화계에 따르면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은 다음 달 11일 개막하는 '지옥의 시왕 : 중세 한국의 사후 세계' 특별전에서 1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왕도' 10폭을 선보인다.
미술관은 누리집을 통해 "1300년대에 제작된 작품"이라고 언급하며 "1960년대 이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심판과 속죄, 구원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과 함께 준비한 전시는 고려시대(918∼1392)를 배경으로 당대 장례 문화 및 사후 세계와 관련한 신앙, 미술을 120여 점의 유물로 소개한다.
전시를 기획한 임수아 클리블랜드미술관 큐레이터(한국국제교류재단 한국미술사 석좌학예관)는 연합뉴스 서면 인터뷰에서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다룬 전시라고 설명했다.
임 학예관은 "고려 불교 미술에 대한 최근 연구 성과를 토대로 고려 유물을 새롭게 조망하고 삶과 죽음,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을 입체적으로 소개하고자 했다"고 강조했다.
전시의 핵심은 시왕의 세계를 구현한 공간이다.
벽면을 따라 나란히 선보이는 10폭의 시왕도는 일본 미술 수집의 대가로 알려진 해리 패커드(1914∼1991)가 소장했던 작품이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하버드대 새클러미술관, 하와이 호놀룰루미술관, 덴버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등이 소장한 9폭의 그림만 알려져 있었다.
클리블랜드미술관은 2019년 시왕 가운데 4번째에 해당하는 그림을 구입한 뒤, 1961년 이후 행방이 묘연한 3번째 그림의 존재를 찾아 나섰다.
그 결과, 지난해 일본 군마현립근대미술관에서 '사라진 제3 시왕'(송제왕)을 확인했고, 협의 끝에 10폭의 그림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었다.
미술관은 이 작품을 1천300년대 후반 즉, 고려시대 시왕도로 소개할 예정이다.
고려 불화, 그중에서도 시왕도 10폭 전체가 온전히 남아있는 사례는 매우 희귀해 제작 연대나 국적을 정확히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패커드가 소장했던 시왕도의 경우 하버드대 미술관은 '14세기 후반, 고려' 유물로 설명하지만, 덴버미술관은 국적에 대해 '불확실'(Uncertain)하다고 본다.
제5 염라왕, 제8 평등왕, 제10 오도전륜왕 등 총 3점의 그림을 소장한 국립중앙박물관은 유물 정보와 관련해 '국적 미상, 시대 미상'이라고 밝히고 있다.
미술관 측은 전문가 자문을 거쳐 고려시대 작품으로 소개하기로 했다.
불교 회화를 연구하는 한 연구자는 "기존에는 해당 작품을 고려시대 혹은 중국 원나라 그림으로 봤으나, 최근에는 고려 불화로 보는 연구자들이 많은 편"이라고 전했다.
임 학예관은 그간 고려 불교 미술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이뤄져 왔다며 "이번에 모인 시왕도를 통해 작품에 대한 학술 논의가 이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전시에는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과 유족이 국가에 기증한 또 다른 시왕도, 클리블랜드미술관이 소장한 남송 또는 원대의 시왕도 화첩도 함께 선보일 예정이다.
지난해 미술관이 새롭게 확보한 지장보살 그림은 눈여겨볼 만하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화는 지옥의 고통에서 허덕이는 중생을 극락세계로 인도해 준다는 보살인 지장보살의 모습을 담고 있다.
미술관 측은 "연구자들에게는 알려져 있었지만, 일본의 개인 (수장가) 소장품이라 일반에는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당초 명나라 작품으로 알려졌던 고려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도 관람객과 만난다. 국내외에 남아있는 수월관음도 중에서도 빼어난 작품으로 꼽히는 그림이다.
임 학예관은 "1928년에 프린스턴대 박물관이 구입한 뒤, 명나라 작품으로 잘못 분류돼 있었지만 조사를 통해 고려시대 수월관음도로 확인했다"고 전했다.
전시는 고려 문화와 불교 미술에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곳곳에 신경을 썼다.
고려시대 석관 곁에는 재미교포 작가 아니카 이의 작품을 배치했고, 시왕도 전시 공간에는 아티스트 겸 영화감독 박찬경의 영상 작품 '늦게 온 보살'을 함께 비춘다.
임 학예관은 "죽음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인간의 보편적 경험"이라며 "미술사를 넘어 정치·환경사를 아우르는 관점에서 감상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1월 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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