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했던 일제의 '제암리 학살'…"아프지만 기억해야 할 과거"

'3·1운동' 확산 두려웠던 日, 제암교회에 주민 23명 가두고 잔혹 살해
강신범 목사, 유해 발굴 백방 노력…'학살 100주년' 日교인들 찾아 사죄

양정우

| 2022-10-07 07:31:01

▲ "'제암리 학살' 아픈 과거지만 기억해야죠" (화성=연합뉴스) 양정우 기자 = 경기 화성의 제암교회 강신범 전 담임목사가 지난 5일 교회 예배당에서 1919년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제암리 학살사건'을 설명하고 있다. 2022.10.7 eddie@yna.co.kr (끝)
▲ 제암리 학살사건 희생자 23인 조각물 (화성=연합뉴스) 양정우 기자 = 지난 5일 찾은 경기 화성의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앞 조형물. 희생자를 기억하기 위한 23개의 크고 작은 기둥이 서 있다. 2022.10.7 eddie@yna.co.kr (끝)
▲ "고통스럽지만 '제암리 학살'을 기억하라" (화성=연합뉴스) 양정우 기자 = 한국교회총연합 대표회장 류영모 목사(왼쪽)와 제암교회 강신범 전 담임목사가 지난 5일 예배당에서 손을 잡은 채 일제의 '제암리 학살사건'을 설명하고 있다. 2022.10.7 eddie@yna.co.kr (끝)

잔혹했던 일제의 '제암리 학살'…"아프지만 기억해야 할 과거"

'3·1운동' 확산 두려웠던 日, 제암교회에 주민 23명 가두고 잔혹 살해

강신범 목사, 유해 발굴 백방 노력…'학살 100주년' 日교인들 찾아 사죄

(화성=연합뉴스) 양정우 기자 = 1919년 경기 화성 제암리에서 일본군이 자행한 주민 학살사건은 말그대로 참혹했다.

일제는 그해 3·1운동 여파가 전국으로 확산하는 것을 경계했으나 독립을 향한 열망은 서울을 넘어 수원, 화성 등 각지로 넘실거렸다.

그해 3월 25일 제암리 마을 뒷산에서 주민들이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외친 데 이어 같은 달 31일 발안장터에서는 1천 명이 태극기를 앞세워 만세를 외쳤다.

4월 5일에도 발안장에 모인 교회 청년들과 주민들이 거리에서 만세를 부르려 했으나 일제의 무차별 진압이 벌어져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제는 연이은 만세운동에 급기야 군을 동원했고, 제암리 학살사건은 이런 과정에서 벌어졌다.

일본군은 같은 달 15일 제암교회에 15세 이상 마을 남성을 교회당에 모이도록 했다. 군은 예배가 없는 날 주민들을 교회로 불러 모으기 위해 모종의 사과를 한다는 핑계를 댔다고 한다.

일본군은 교회당에 사람이 모이자 출입문과 창문을 잠그고서 내부로 총을 난사했다. 이후 시신은 교회 밖으로 꺼내 짚과 함께 태웠다. 당시 학살로 희생된 주민은 총 23명. 이제 막 신앙에 다가선 개신교인들이었다.

일본군은 이웃 마을 고주리에서도 6명을 살해했다. 이들은 개신교인과 함께 독립운동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천도교인들이었다.

103년이 지난 제암리 학살 현장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서 있었다. 1905년 살림집에서 시작했으나 학살사건 속에 사라졌던 제암교회는 신축과 증·개축을 반복하며 기념비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교회 오른쪽 언덕에는 제암리 학살사건 희생자들의 유해가 큰 봉분 아래 단체로 모셔져 있었다.

제암리 학살은 사건 이후 현장을 찾은 언더우드 등 선교사와 외교관, 외신 기자들에 의해 서울과 나라 밖으로 알려졌으나 희생자들의 유해가 발굴돼 모셔진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1980년대 일이다.

1980년 제암교회에 부임한 강신범(81) 목사는 당시 학살로 남편을 잃은 전동례 할머니를 통해 어렴풋했던 학살의 진상을 또렷하게 알게 됐다고 했다.

지난 5일 제암교회에서 만난 강 목사는 "전동례 할머니 말씀이 사건 당시 희생자들의 유해가 마치 한덩어리 처럼 뭉쳐있어서 시신 하나하나를 분리하기가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했다"고 전했다.

"어떻게 이렇게 잔학한 짓을 할 수 있는지 할머니가 울먹이시더라고요. 하지만 제암리 사건을 잘 모르고 있는 이들이 많았죠. 역사적 사실은 있는 그대로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강 목사는 서울로 올라와 유해 발굴에 도움을 받고자 백방으로 뛰었고, 정부 지원으로 1982년 9월 희생자 유해 발굴을 시작했다. 수습된 유해들은 합동 장례를 치르고, 교회 옆 언덕에 함께 안치했다.

제암리 학살은 일제의 만행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일이지만 강 목사의 말처럼 개신교인들 사이에서도 자세히 진상을 아는 이가 많지 않다.

강 목사는 일본에 초청돼 제암리 사건 진실을 알리는 강연을 하곤 했는데, 자신이 전하는 이야기에 크게 놀라거나 곤혹스러워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떠올렸다.

"일본에서 강연하는데 제암리 학살사건을 들어보지도 배우지도 못한 일이라며 놀라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젊은 학생들은 사실대로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교회 한두 곳에서 불러 강연을 하다 나중에는 학교에서도 초청했어요."

학살의 진상을 알리는 일이 지속하면서 일본 개신교계에서는 2019년 제암리를 찾아 가해자를 대신해 사과하고,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를 올리는 일이 있었다.

제암교회 예배당에서 일본 목회자 10여 명이 단체로 엎드려 절을 하며 "일본인들을 용서해달라"며 절규했던 일은 한국과 일본인 모두에게 격한 감정을 불러왔다.

제암리 학살이 벌어진 지 꼭 100년 만의 일이었다.

강 목사는 제암교회 담임목사로 온 지 32년만인 2012년 은퇴했다. 여든이 넘은 나이지만 학살사건을 또박또박 설명하는 모습은 담임목사 시절 그대로인듯했다.

"저는 만나는 분들에게 '3·8·6' 딱 3가지만 기억해달라고 합니다. 3·1운동, 8·15광복, 6·25 한국전쟁입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아픕니다. 하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게 중요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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