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주성
| 2023-07-06 07:20:01
정영주 "무대위 곰같이 굳건한 모습에 '정승모근' 별명 생겼죠"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서 신체 활용한 연기…"목표는 작품 연출"
(서울=연합뉴스) 최주성 기자 = 고요한 무대에 홀로 오른 베르나르다 알바가 벨벳 드레스를 벗자 근육이 붙어 강인해 보이는 팔뚝이 드러난다.
베르나르다를 연기하는 배우 정영주(52)는 묵직한 팔로 다섯 딸에게 거침없이 체벌을 가한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일 없이 무대를 지키는 그의 모습에서는 무게감이 느껴진다.
정영주는 최근 서울 중구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베르나르다'라는 이름의 어원을 쫓으면 '곰'"이라며 "웬만한 비바람과 천둥에도 버틸 수 있는 굳건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팬들은 무대에서 강한 모습을 보이는 그에게 '정승모근'이라는 별명을 붙이며 호응을 보내고 있다. 정영주는 배우로 데뷔했던 1994년과 비교해 신체적인 강점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게 된 지금의 현실이 감사하다며 웃었다.
"당시에는 전형적인 신체 규격과 거리가 멀다며 공격도 많이 받았죠. 그런 이야기들을 받아들이고 버티다 보니 이제는 곰도 하고 사자도 하게 됐네요."
지난 달 16일 세 번째 시즌으로 개막한 '베르나르다 알바'는 스페인 출신의 시인 페데리코 로르카가 쓴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1930년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남편의 8년 상을 치르는 베르나르다와 다섯 딸의 이야기를 그린다. 남편의 여성 편력으로 고통받은 베르나르다는 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외부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딸들의 마음에 차오르는 욕망은 폭력으로 다스린다.
정영주는 "폭력을 남발하는 베르나르다는 제가 봐도 용서받지 못할 캐릭터"라며 "맨손으로 때리는 연기를 하다가 오른쪽 팔목을 다치기도 했다. 고맙게도 배우들은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든다'고 말해준다"고 전했다.
연기와 함께 플라멩코 음악과 안무를 선보여야 하기에 체력 소모가 더 클 수밖에 없다. 배우들은 트로트처럼 끝 음을 꺾어 처리하는 '칸테' 창법과 손뼉으로 리듬을 만드는 '팔마' 동작 등을 익히기 위해 11주를 투자했다.
정영주는 "한국 사람이 플라멩코를 배우는 건 외국인이 살풀이를 배우는 것과 같다"며 "동작이 몸에 붙을 때까지 시간을 들이는 수밖에 없다. 배우들이 치열하게 쫓아와 줘서 고마우면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밝혔다.
'베르나르다 알바'는 시즌을 거듭하면서 '여성 배우만 출연하는 뮤지컬'로 자리를 잡았다. 주제 면에서도 여성이 욕망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이야기는 드물다. 정영주는 이런 작품이 드물다는 점을 지적하며 창작진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여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작품은 모성을 다루거나, 불평등이나 혐오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되곤 한다"며 "결국 창작진들이 움직여야 관객에게 선택권이 넓어진다. 보다 다양한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는 생각에 의무감이 든다"고 말했다.
지난 시즌부터 작품의 제작에도 참여하기 시작한 정영주는 극이 전하는 메시지에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일부 관객은 '구시대적 여성상이 드러난다'며 비판하지만, 작품은 원작의 배경과 설정을 그대로 무대에 올리고 있다.
그는 "극의 핵심은 자유를 향한 욕망을 꺾거나 차단할 수 없다는 것"이라며 "1930년대에도,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욕망은 성별과 관련 없이 누구나 가지는 감정이기에 단지 여성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도 아니"라고 말했다.
이어 "당시의 시대상을 그대로 옮겨와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사실에 책임감을 느낀다. 배우로 생활하는 동안 작품을 계속 올리면서 현실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데뷔 30주년을 앞둔 정영주의 목표는 '베르나르다 알바'의 정식 연출을 맡는 것이다. 서울예전 극작과 출신인 정영주는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베르나르다를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한다.
"제가 베르나르다를 맡지 않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해요. 여배우들이 이 공연을 한 번 경험하고 나면 다른 작품을 만나도 캐릭터를 이해하는 시야가 달라질 것이라고 자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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