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미
| 2026-09-05 07:14:24
(도쿄=연합뉴스) 조성미 특파원 = "기사가 아예 안 나가거나 나간다면 짧게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자기가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낸 양 영웅 심리를 갖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왁자지껄해지면 다른 지역 사무실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고요."
간토대지진 103주년이었던 지난 1일 일본 지바현의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지역 사무실에 면도칼과 현금 15엔 50전이 든 우편물이 배달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사무실 관계자는 사건에 관해 묻는 말에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간토대지진은 1923년 10만여 명이 사망한 규모 7.9의 대지진이다. 한국인에게는 단순한 자연재해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대지진 후 일본 사회에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방화한다' 등의 유언비어가 악의적으로 유포됐고, 이후 6천 명으로 추산되는 조선인이 집단의 광기 속에 목숨을 잃었다.
당시 조선인을 구별하기 위해 학살자들이 사용한 방법이 '十五円 五十錢'(주고엔 고짓센)을 발음해 보라는 요구였다.
우리말엔 없는 일본어 탁음이 많이 들어간 이 단어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이들이 무참히 살해됐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 등 다른 외국인은 물론 청각 장애나 지방 출신 등의 이유로 발음이 어눌한 일본인들도 다수 희생된 것으로 전해진다.
103년이 지난 지금 민단 사무실에 면도칼과 함께 배달된 것이 바로 15엔 50전이었다고 한다. 요즘은 쓰지도 않는 50전 화폐를 용케도 구해서 보냈다는 '외로운 늑대'가 무슨 생각을 하며 보냈을지 짐작이 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음침하게 우편물 발송을 준비하면서 뭔가 대단한 일을 한다고 생각했을 테다.
협박 피해자인 민단 측에서도 이 사건이 크게 기사화되며 그에게 심리적 만족감을 주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사건 발생 기사 자체는 최대한 무미건조하게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씁쓸한 뒷맛이 오래 갔다.
그러다 발견한 것은 일본인들이 많이 쓰는 소셜미디어 엑스(X)에서 이 사건이 커다란 공분을 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화제가 될수록 범인이 우쭐거릴 수 있다는 피해자 걱정에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나 보다.
다만, 사건에 대한 일본 엑스 이용자들의 반응은 두려움이나 놀라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비겁하다", "당당하면 양지로 나오라"며 그 음침한 의도를 비웃는 반응이 다수를 이뤘다.
한일관계가 역대급으로 좋은 시기라고 한다.
특파원으로 부임해 반년이 조금 못 되는 동안 길에서 한국말을 하다가 혐한 발언을 맞닥트린 일도 없었고,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는 읽혀도 일본 정부의 한국 언론에 대한 대응도 우호적인 편이다.
일본에 오래 체류한 취재원들은 일제강점기 강제노역 피해자에 대한 한국 대법원 배상 판결에 불만을 품은 일본 정부가 한국에 경제보복을 가하고 한국은 '노노재팬'으로 응수했던 2019년쯤과는 사뭇 달라진 풍경이라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아무리 한일관계가 화해 무드라고 해도 식민 지배 대한 일본의 후속 조치에 큰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1945년 8월 원자폭탄이 투하된 히로시마시와 나가사키시가 매년 작성하는 희생자 명단은 올해도 조선인에 대한 별도 집계 없이 일본인 희생자와 뭉뚱그려진 채 발표됐다.
원폭 피해자의 20%가량이 조선인이라는 추정이 있고 조선인 피해자를 일본 정부 차원에서 별도 집계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지만, 올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규모 학살에 대한 도쿄도지사의 '무시'는 올해도 계속됐다.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올해도 조선인 학살 희생자를 기리는 추도사를 내지 않으면서 대학살의 주 무대인 도쿄도의 외면은 10년을 꽉 채워 이어지게 됐다.
일본에서 열리는 역사·평화 문제에 관한 토론회 등에 가면 청중의 대부분이 연세가 지긋한 노인들이다. 제국주의와 전쟁을 직접 겪은 이들이기에 역사의 과오 반복을 막는 데 열심이다.
노구를 이끌고 역사를 잊지 않는 행사에 참석하는 그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일본 젊은이들은 역시나 과거사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인가 씁쓸해진다.
하지만, 민단 사무실에 면도칼과 동전을 보낸 협박범에 대한 일본 네티즌들의 비아냥 섞인 비판이 쏟아지는 것을 보며 일본에서 양심을 가진 이는 노인만 있는 것은 아니란 안도가 생겼다.
비가 추적추적 내린 4일 오후 도쿄도 청사 앞에서는 DJ 22명과 젊은 청중들이 신나는 음악을 틀어놓고 큰 소리로 요구했다. 간토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 희생자에 대한 추도문을 내지 않는 고이케 지사는 반성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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