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서
| 2026-08-29 07: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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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연합뉴스) 박영서 기자 = 설악산 자락에 회색빛 건물들이 반듯한 직선을 그리며 서 있다. 화려한 장식도, 자연을 가로막는 벽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강원 인제군 북면 용대리 만해마을이다.
직선은 만해 한용운 선사의 올곧은 정신을, 장식 없는 노출 콘크리트는 자연이 공간의 주인이라는 철학을, 사방으로 열린 공간은 불교의 공(空) 사상을 담고 있다.
만해마을은 한용운의 삶과 사상을 기리고, 그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2003년 문을 연 복합문화공간이다.
만해문학박물관을 비롯해 문인과 예술인들의 창작공간, 공연장, 숙박시설 등이 들어서 있어 단순히 한용운의 흔적을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들이 머물며 문학과 문화, 자연을 함께 누리는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정충래 만해마을 원장은 "도심지가 아닌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모아 여러 문화행사를 이어가는 거점 역할을 하는 것이 만해마을의 가치"라고 말했다.
올해 만해마을은 어느 때보다 특별한 한 해를 보내고 있다.
1926년 세상에 나온 한용운의 대표 시집 '님의 침묵'이 발간 100주년을 맞았기 때문이다.
이를 기념해 만해문학박물관에서는 특별전 '만해 정신을 이룬 장소와 사람, 그리고 책과 글'이 한창이다.
전시장에는 '님의 침묵' 초판본을 비롯해 한용운의 친필 유묵과 원고, 사진, 당시 신문과 잡지 등이 놓여 그의 삶과 사상을 9개 주제로 보여준다.
충남 홍성이 고향인 만해 선사와 인제의 인연은 100여년 전 백담사와 오세암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용운은 백담사에서 출가해 승려의 길에 들어섰고, 설악산 일대에서 수행하며 사상적 토대를 다졌다.
만해 정신의 고향은 인제이고 설악산이며, 백담사와 오세암이라고 할 수 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후략)'
100년 전 한용운이 시로 그려낸 '단풍나무 숲' 풍경은 오는 9월 설악산 자락에서 현실이 된다.
인제군은 오는 9월 13일 만해마을에서 백담계곡을 거쳐 백담사까지 9.5㎞ 구간을 걷는 '백담 순례길 걷기' 행사에 이어 백담사 일원에 당단풍나무와 복자기나무 30그루를 심어 만해가 시로 그려낸 풍경을 현실의 숲길로 만든다.
100년 전 종이 위에 쓰인 시구가 한용운의 발자취가 남은 설악산 자락에서 실제 길과 숲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인제군이 되살리려는 만해의 흔적은 시 속 풍경에만 머물지 않는다.
설악산 깊숙한 곳에 자리한 오세암에는 한용운의 사상과 문학세계가 싹트는 데 영향을 준 것으로 전해지는 팔만대장경 인경본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한용운은 1896년 처음 오세암에 들어온 데 이어 1905년 백담사에서 출가했으며, 오세암에서 대장경을 접하고 불교 수행과 공부를 이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제군은 오세암을 찾았던 영국 성공회 선교사 찰스 헌트의 설악산 기행문에 대장경을 보관했던 전각인 대장전(大藏殿)의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는 점 등을 토대로 한국전쟁 때 사라진 대장전을 다시 세우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과거의 흔적을 되살리는 작업과 함께 만해의 정신을 오늘날의 언어로 이어가는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대표적인 행사가 올해로 30회를 맞은 만해축전이다.
만해마을에서는 해마다 학술대회와 문학 행사, 공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한용운의 문학과 사상을 되새기고 있다.
1997년 시작한 만해대상은 지난 30년간 국가와 민족, 종교와 이념의 경계를 넘어 평화와 인권에 헌신하거나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문학과 예술로 인간의 존엄과 시대정신을 밝혀온 이들을 찾아 만해의 정신을 현재로 이어왔다.
정 원장은 "만해 정신에는 어떤 울타리도 없다"며 "불교계나 내국인만을 고집하지 않고 인종과 국가, 종교에 관계없이 인류를 위해 공헌한 사람들을 찾아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만해마을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채워주기보다 오히려 비워낼 수 있는 공간을 지향한다.
이는 만해마을을 처음 설계할 때부터 공간 곳곳에 담아낸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화려한 색과 장식을 덜어내 자연에 시선이 머물도록 하고, 건물과 건물 사이를 열어둔 것도 결국 인간이 만든 공간보다 설악산의 자연을 온전히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다.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조용히 머물거나 말없이 숲길을 걸으며 자신을 돌아보는 이들이 적지 않은 이유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님의 침묵'이 세상에 나온 지 100년. 한용운은 떠났지만 그가 남긴 문학과 정신은 설악산 자락의 길과 숲, 그리고 만해마을에서 또 다른 100년을 향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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