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의래
| 2026-03-08 07:07:01
"실패도 좋아"…원색과 여백으로 그린 앤디 피셔의 동물들
싸우는 듯 노는 듯…서양 회화 관습에 도전하는 그림들
독일 작가 앤디 피셔 첫 국내 개인전…갤러리바톤서 4월 11일까지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뱀이 악어의 꼬리부터 온몸을 조이고 있다. 악어는 입을 벌려 뱀의 목을 물려 한다. 글로만 보면 자연에서 벌어지는 뱀과 악어의 긴장감 넘치는 사투처럼 보인다. 하지만 앤디 피셔(38)의 그림에서는 악어와 뱀이 장난치며 노는 모습처럼 보인다.
크레용 같은 오일 스틱을 사용해 원색의 평면적 이미지로 새, 뱀, 호랑이, 늑대 등을 그리는 독일 작가 앤디 피셔의 개인전 '페일 굿'(Feil Good)이 서울 한남동 갤러리바톤에서 열리고 있다.
그의 그림에는 악어, 호랑이, 독수리, 뱀, 까마귀 등이 등장한다. 밝은 원색으로 단순하게 동물을 표현하는 방식은 아이가 그린 듯 천진한 느낌을 준다.
이 동물들은 알브레히트 뒤러, 페테르 파울 루벤스, 마리아 시빌라 메리안 등 16∼17세기 작가들의 작품 속 이미지에서 가져왔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이런 동물들은 낯설고 이국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이번 전시를 위해 한국을 처음 찾은 작가는 "당시 유럽인들은 상상 속에서만 있던 존재들을 그림으로 보며 즐거워하고 신기해했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흥미를 느껴 나도 그림으로 그려봤다"고 말했다.
작가는 밑칠을 최소화한 흰 캔버스 위에 오일 스틱과 연필로 원색의 평면적 이미지를 즉흥적으로 구축한다.
그의 그림에는 보통 두세 가지 대상이 등장한다. 이들의 관계는 싸우는 것 같기도 하고 친하게 노는 것 같기도 하다. 서양 회화에서 동물은 위계적 관계 속에 있거나 인간의 지배 아래 놓인 존재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서는 이런 위계 없이 공존하거나, 화면 한쪽에 치우치게 그리는 등 관습을 전복한다.
작가는 "(작품 속 대상들이 서로) 가깝다거나 멀다거나, 친하다거나 싸운다고 명확히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관계 맺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며 "어떤 관계인지 해석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라고 말했다.
그의 그림에서 또 다른 특징은 여백의 허용이다. 동물들 뒤로는 대부분 공백으로 뒀다. 색을 칠하더라도 띄엄띄엄 여백을 남긴다. 여백을 미완성으로 보는 서양 회화의 관습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작가는 "내 그림의 여백은 긴장감이다. 대상과 대상 사이, 그림과 관객 사이의 긴장"이라며 "뭔가를 더 그려야 한다는 긴장을 견디고 불안정한 채로 유지하는 것이 내 작업"이라고 말했다.
작가는 2018년 베를린 예술대학교를 졸업했다. 토이 베를린 마스터즈 어워드를 받으며 유럽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마드리드 블랑카 & 보르하 티센-보르네미사 컬렉션, 홍콩 버거 컬렉션, 멕시코시티 AMMA 재단, 라이프치히 힐데브란트 컬렉션 등에 소장돼 있다.
이번 전시의 제목 페일 굿은 실패도 좋다는 의미다. 제목부터 'Fail'을 제대로 쓰는 데 실패해서 'Feil'로 잘못 썼다.
작가는 전시 제목을 이렇게 지은 이유에 대해 "실패에서 배우는 것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매일 실패하며 매일 배운다"며 "더 친절한 사람이 되고 더 좋은 시간을 보내고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데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다"며 웃었다.
전시는 4월 1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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