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의래
| 2026-02-27 07:07:02
눈 대신 손으로 읽다…촉각으로 확장한 엄정순의 감각 미술
50만 명의 체온이 남긴 흔적 보푸라기, 회화로 재탄생
학고재서 엄정순 개인전 '보푸라기 - 촉각적 사건'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우리는 살면서 너무 시각에만 의존하고 있어요. 우리에겐 시각 외에도 여러 감각이 있는데 이걸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니 얼마나 아까운지 몰라요. 미술도 시각에서 벗어나 촉각으로 느껴보면 어떨까요."
보는 것을 넘어 촉각 등 다양한 감각으로 미술을 연구해 온 작가 엄정순(65)의 개인전 '보푸라기 - 촉각적 사건'이 서울 소격동 학고재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점자책과 조형 작업 등으로 시각에 의존해온 기존의 감상 방식을 넘어 감각의 다양성과 인식의 가능성을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남는 흔적을 통해 '본다'는 행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손끝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감각과 청각 등 다른 감각을 통해 인식의 지평을 확장한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시각보다 촉각이 주가 되는 전시"라며 "촉각은 세계와 신체가 만나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이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의 대표 작품은 '무늬 없는 리듬' 연작이다. 이 작품은 2023년 제14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선보였던 설치 작업 '코없는 코끼리'를 잇는 회화 작업이다.
당시 작가는 천, 양모, 철판으로 코 없는 코끼리 조각을 만들었고, 관객들에게 작품을 직접 만지며 감상할 것을 권유했다.
그 결과 수많은 관객이 작품을 만졌고, 스치며 남긴 체온과 마찰은 양모 표면에 '보푸라기'라는 물질적 흔적으로 남았다.
작가는 이 보푸라기를 추상 회화 작업에 붙이는 방식으로 '무늬 없는 리듬' 연작을 만들었다. 작품 밑에는 '50만 명의 체온으로 빚어낸 무늬 없는 리듬'이라고 적었다. 50만 명은 2023년 광주비엔날레 관객 수다.
작가는 "보푸라기가 50만 명의 체온, 감정, 마찰 등 수많은 감각이 축적된 물질이라는 생각이 들어 작품으로 활용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설치 작품 '찰나 2001-1'은 천 권이 넘는 점자책으로 이뤄져 있다. 알루미늄 프로파일에 달린 점자책들은 선풍기 바람에 의해 각기 다른 페이지가 펼쳐진다.
이 점자책은 시각으로는 읽을 수 없지만 촉각으로는 읽을 수 있는 텍스트다. 읽는 행위가 반드시 눈을 통해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환기한다.
'찰나 2001-1' 앞에 놓인 점자책 '흑연으로 쓴 코끼리-기록되지 않은 도서관'은 점자책을 정보 전달의 매체를 넘어 하나의 조형적, 개념적 작품으로 전환한 작업이다.
작가는 점자책 위에 목탄으로 점자 글을 적어 놓았다. 관람객들이 손끝으로 점자책을 읽으면 그 위에 쓰인 목탄 글씨가 번지게 된다.
작가는 "이 전시가 끝날 때는 글씨가 다 뭉개져 오직 손으로만 글을 읽을 수 있도록 변형될 것"이라고 말했다.
'코끼리의 어느 모서리'는 코끼리의 일부를 파편처럼 분리해 놓은 작품이다. 작가의 과거 작품 '코없는 코끼리' 조형을 해체해 각각 독립된 오브제로 만들었다. 코끼리의 전체 형상은 사라졌지만, 그 일부는 여전히 코끼리를 연상시키는 상징으로 남아 있다.
작가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이 어리석은 말처럼 쓰이지만, 시각을 포함한 인간의 감각은 제한돼 있어 누구나 파편을 더듬으며 전체로 갈 수밖에 없다"며 "보는 것과 만지는 것은 분리된 감각이 아니라 함께 작동해야 하는 인식 방식"이라고 말했다.
충북 충주 출신인 작가는 이화여대 서양화과 졸업 후 독일 뮌헨대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건국대 예술대학 회화과 교수를 역임했다.
1996년 사단법인 '우리들의 눈'을 설립해 맹학교 미술교육 등 출판, 전시, 아트 프로젝트, 예술교육 관련 다양한 사업을 이끌고 있다.
전시는 3월 2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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