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지철
| 2023-07-17 07:00:08
[지방소멸에 맞서다]⑩ 제주 동쪽끝 마을, '워케이션 성지'로 떠오르다
세화리, '워케이션 센터' 만들어 마을발전 원동력 삼아
이용객들 "생각보다 훨씬 업무 잘돼 놀라워", "나 자신 돌아보는 시간 만족"
마을에 활기 돌면서 이주민도 늘어…"원주민 따뜻하게 감싸줘 행복지수 200점!"
[※ 편집자 주 = 2010년대 중반 지역소멸론이 제기된 당시 79개이던 '소멸 위험' 지역은 올해 118곳으로 늘었습니다.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의 절반을 넘습니다. 이제 그 그림자는 대도시까지 드리우고 있습니다. 모두가 암울한 현실만을 얘기하는 이때 온 힘으로 저출산과 초고령화에 맞서는 지자체들이 있습니다. 지자체와 주민들이 힘을 모아 출산율을 끌어올리고 인구 유치에 발 벗고 나서는 그곳, '지방소멸에 맞서는' 그곳들이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그 현장을 생생하게 취재해 매주 월요일 1편씩 기획 기사를 송고합니다.]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출퇴근 시간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데, 생각보다 훨씬 업무가 잘 돼 깜짝 놀랐어요!"
일과 휴가를 병행하는 '워케이션' 공간을 찾아 7월 초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를 찾은 채지수(39) 씨는 "사무실처럼 근무환경이 잘 갖춰져 있으면서도 창밖으로 예쁜 바다가 보여 기분전환도 된다"며 큰 만족감을 드러냈다.
채씨가 몸담고 있는 서울의 금융회사는 지난해 워케이션 프로그램을 시범 도입, 직원들이 제주에 머무르며 근무할 수 있도록 했다.
직원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자 회사는 올해도 3월부터 7월까지 매주 직원 10∼15명씩을 워케이션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하고 있다.
각기 다른 부서에서 온 직원들은 일주일 동안 제주의 호텔, 리조트 등에 머물면서 세화리 공유오피스에서 함께 근무한다.
채씨는 "회사가 규모가 있다 보니 다른 부서 직원과 어울릴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제주에 와서 함께 식사하고 아침 일찍 성산일출봉에 가서 일출도 보고 하면서 유대감을 쌓을 매우 좋은 기회가 됐다"고 했다.
같은 회사 동료 김모(37) 씨는 "직원 중에는 가족과 함께 제주에 내려와 저녁 시간이나 주말을 같이 지내는 등 정말 휴가를 보내며 일을 하시는 분도 있다"고 전했다.
그는 "직원들의 만족도가 높은 만큼 연 1회 정도 정기적으로 하면 좋겠다"며 "회사에 대한 애사심도 충분히 올라갈 듯싶다"고 말했다.
◇ 제주 동쪽 끝 마을, '워케이션의 성지'가 되다
제주 동쪽 끝자락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 세화리는 '워케이션의 성지'로 불린다.
'워케이션'(workation)은 일(work)과 휴가(vacation)를 합쳐 만든 합성어다. 산과 해변 등 휴양지에서 일과 휴식을 병행하는 새로운 근무 방식으로, 코로나19 이후 확산하고 있다.
IT업계에 종사하면서 제주에서 한 달 살기를 하는 프리랜서 차모(43) 씨는 지역 주민의 소개로 세화리 공유오피스를 찾았다.
차씨는 "제주에 이런 공간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며 "프리랜서들에게 최적의 장소"라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일반 카페에 가서 일할 때도 있는데, 오랜 시간 일하기에는 근무환경을 제대로 갖춰놓지 않아 힘들 때가 많죠. 이곳은 모니터, 복사기, 프린터 등을 모두 갖춘 데다, 커피 한 잔만 시켜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 매우 만족스러워요."
세화리 공유오피스를 이용하는 기업들은 금융, IT, 식품, 온라인 쇼핑몰 등 각 분야에 걸친 국내 굴지의 대기업과 중소기업들이다.
지난해 20개 기업 600여 명이 이용했다. 올해 상반기 이용객도 벌써 450여 명에 달한다.
세화리는 이제 마을의 변신을 꾀하는 전국 곳곳의 지자체나 마을 대표들이 찾아와 견학할 정도로 이름난 '롤 모델'이 됐다.
부지성(50) 세화리 이장은 "지난해 우리 마을을 견학하러 전국 109곳 마을에서 2천474명, 관련기관에서 677명이 다녀갔다"며 "이제는 손님맞이 하느라 농사지을 시간도 없을 정도"라고 흐뭇한 표정으로 웃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하루아침에 이뤄낸 성과가 아니다. 그 뒤에는 마을 주민들의 수년에 걸친 헌신과 노력이 있었다.
◇ 477명의 주민들, 마을의 모습을 바꿔놓다
세화리 공유오피스가 자리한 건물 2층의 카페 이름은 '477+'이다.
바로 세화리를 워케이션의 성지로 만든 주민 477명을 기억하고자 붙인 이름이다. '+'는 더 많은 사람의 참여를 기대한다는 의미이다.
사실 수년 전까지 세화리도 여느 지자체와 다를 바 없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청년층은 이탈하고, 마을은 고령화하고, 인구는 줄어드는 인구소멸 위험을 걱정했다. 공동체 의식과 결속력 또한 날로 느슨해졌다.
주민들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스스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는 마을의 문제를 주민이 함께 해결하기 위한 협동조합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2019년 10월 결성된 '세화마을협동조합'이었다.
여기에 참여한 주민의 수가 477명이었다. 개인당 최소 20만원, 많게는 1천만원의 출자금을 십시일반 모았다. 농부, 어민, 해녀 등 구성원들도 가지각색이었다.
주민들은 앞서 정부의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에 선정돼 지원받은 86억원을 어떻게 쓸지 머리를 맞댔다.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은 세화리를 '관광'과 '문화'를 입혀 여행자들이 찾는 마을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우선 주민들은 폐건물과 다름없던 마을회관 건물의 리모델링에 나섰다.
과거 결혼식 피로연을 하던 1층 공간은 관광객을 유치하는 여행사와 세화리사무소로 탈바꿈했다.
예식장으로 쓰던 2층은 구좌읍의 명물 당근을 재료로 한 주스와 케이크, 친환경용품 등을 파는 카페 '477+'가 들어섰다. 3층은 공유오피스, 4층은 숙박시설이 자리했다.
재래시장 옆 허름했던 건물은 이제 젊은 세대 감성에 맞는 멋진 현대식 건물로 거듭났다.
2020년 문을 연 '질그랭이 거점센터'다.
질그랭이라는 말은 '지긋이'라는 뜻의 제주 방언이다. 방문객들이 편하게 머물고 쉬면서 다시 찾아오고 싶게 만드는 곳, 주민들도 함께 누리고 채우는 곳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지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 한해 6만명 '질그랭이' 다녀가다
"도저히 풀리지 않던 일들도 잠시 하던 일을 내려놓고 바닷가 한 바퀴 돌고 오면 머릿속이 말끔해지면서 정리가 됩니다."
"마을 이곳저곳 거닐면서 열심히 농사짓는 분들, 물질하시는 해녀 할머니들 모습을 보면 자연스레 나 자신을 돌아보게 돼요."
"심리적 여유가 생기고 동료를 더 이해하게 됐습니다. 정말 좋은 추억 안고 돌아갑니다."
질그랭이 센터를 이용한 사람들의 반응이다.
센터는 문을 연 첫해 1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하지만 차츰 입소문을 타며 관광객들이 찾기 시작하더니 이듬해 곧바로 흑자로 돌아섰다.
지난해에는 공유오피스를 비롯해 숙박시설, 커피숍 등 센터를 이용한 사람이 무려 6만 명에 달했다. 매출도 5억원에 이르렀다. 올해는 6억원 이상을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성공 뒤에는 센터를 단순한 근무 공간이 아닌, '제주를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주민들의 갖은 노력이 있었다.
센터를 찾은 사람들은 해녀 '삼춘'(이웃 어른을 친근하게 부르는 제주어)이 직접 소개하는 해녀의 삶과 문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해녀 삼춘이 잡은 성게와 문어, 뿔소라로 해물라면도 만들어 먹는다.
세화리의 랜드마크인 '다랑쉬 오름'에 가서 숲 다도 체험과 요가, 명상, 노르딕 워킹 등을 즐길 수도 있다. 주말에는 지역 특색 가득한 벼룩시장 '모모장'이 열린다.
프로그램 개발에 참여한 한 주민은 "마을 주민들이 직접 해설사와 일일 강사로 참여하고 있다"며 "직접 참여하지 않는 주민들도 프로그램 참가자나 관광객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어떤 일이든 친절하게 도움을 주려 한다"고 전했다.
◇ 인구가 10% 넘게 늘다…"이주민과 원주민의 단합 덕분"
'워케이션 성지'로서 세화리의 성공은 인구 증가로 이어졌다.
2016년 1천986명으로 2천 명에 못 미쳤던 세화리 인구는 올해 6월 기준 2천271명까지 늘어났다.
전국 대부분의 마을이 인구 감소에 시달리는 것과 달리 인구가 10% 이상 늘어나는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단순히 관광객 등 방문객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마을에 사는 '거주민'이 크게 늘어난 데는 세화리만의 비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원주민과 이주민의 조화와 단합이다.
세화리 사무장으로 질그랭이 거점센터의 안살림을 도맡아 하는 양군모(35) 씨는 학사장교로서 7년간 군생활을 정리하고 세화리에 정착한 이주민이다.
그는 2년 전 둘째가 태어날 당시의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내가 타지에서 홀로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 하고 첫째와 갓 태어난 둘째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었죠. 이런 사정을 들은 동네 삼춘들이 소고기, 전복, 성게 등으로 미역국을 끓여다가 놓고 갔어요. 그 수가 무려 11개였죠."
당시 미역국도 끓일 줄 몰랐던 한 동네 누나는 친정엄마한테 미역국을 끓여달라고 해 냄비째로 가지고 와 직접 양씨의 아내와 아이들을 먹이고 갔다고 한다.
양씨는 "첫째 아이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재워주신 삼춘도 계셨다"며 "그 고마움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세화리에서 두 아들을 키우는 싱글맘 안주희(43) 씨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안씨는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에 왔을 때 지역주민들은 어떤 편견 없이 우리 가족을 맞아주었다"며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가 너무나 편하게 자리잡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힘이 됐다"고 고마워했다.
세화리에서의 삶에 대해 그는 "우리 아이들의 행복지수가 '200점'이다. 동네 삼춘들의 배려로 큰 고민 없이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부지성 세화리 이장은 "제주에서 원주민과 이주민 간 갈등으로 크고 작은 문제가 벌어진다고 하는데, 이건 현명하지 않다"며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농어촌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가 청년 유출이지만, 세화리에는 그런 문제도 없다.
부 이장은 "마을에 정착해 살려는 청년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며 "동네 중고등학생 가운데는 장래 희망이 마을 이장이라는 애도 있고, 마을협동조합 이사장이라고 하는 애도 있다"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세화리는 이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세계관광기구(UNWTO)의 '세계 최우수 관광마을' 선정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이는 관광으로 지역 불균형과 인구 감소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구촌 곳곳의 마을을 선정해 인증하는 사업이다. 전 세계 44개 마을이 인증을 받았다.
정민섭 제주관광공사 매니저는 "UNWTO의 세계 최우수 관광마을에 세화리를 한국 대표로 출품했다"며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제주의 대표 지역관광 모델로 많이 알려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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