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연재
| 2026-06-02 07:00:06
[여행honey] 숲속에 펼쳐진 인문…양평 메덩골정원
(양평=연합뉴스) 성연재 기자 = 경기 양평군 양동면 메덩골정원이 이달 현대정원을 새롭게 개관했다.
메덩골정원은 세계 최대 규모의 인문 정원을 표방하는 약 6만 평 규모의 숲속 정원이다.
이곳은 단순히 꽃과 나무를 감상하는 데 그치는 정원이 아니다.
조경과 건축, 예술, 음악, 철학을 한 공간에 담아 방문객이 정원을 걷는 동안 한국 전통과 세계 철학을 함께 만날 수 있도록 구성했다.
메덩골정원은 봄나들이 장소라는 말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이곳의 정원은 꽃을 심고 나무를 가꾼 공간에 머물지 않는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건축과 조경, 음악과 철학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미로 같은 공간에서는 바이올린 선율이 울리고, 정자와 연못 주변에서는 판소리가 계곡을 울린다. 정원은 단순히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걸으며 읽고, 듣고, 생각하는 공간이 된다.
◇ 사유의 기회 제공하는 현대정원
입구로 들어서면 큰 네 잎 클로버 같은 문양이 먼저 방문객을 맞는다.
클로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메꽃을 형상화한 문양이다. 꽃잎 네 장을 가진 메꽃이 바람에 팔랑개비처럼 도는 모습을 문자처럼 풀어냈다고 한다.
메덩골이라는 이름도 메꽃이 많은 골짜기라는 뜻에서 나왔다. 관람은 현대정원에서 시작했다. 현대정원은 철학의 정원인 '생각의 섬'과 한국 근현대사를 조경으로 풀어낸 '대한민국 이야기'로 구성됐다.
정원은 독일 철학자 니체의 초인 정신에서 영감을 받아 기획됐다. 프랑스 조경가 기욤 고스 드 고르를 비롯한 세계적인 건축가와 한국의 이재연 등 조경가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동서양의 철학과 문학, 대한민국 현대사의 주요 장면을 정원 안에 펼쳐냈다. 현대정원은 돌과 나무, 건축물들을 적절히 배치해 방문객의 걸음을 자연스럽게 멈춰 세운다.대한민국 이야기 구역에는 '선비의 나라', '불굴의 정신' 같은 이름을 단 정원들이 이어진다. 고단한 삶을 견뎌 온 이 땅의 역사가 정원의 길 위에 차례로 놓였다. '피난길'을 지나 '한강의 기적', '번영의 시대'에 이르는 흐름도 조경으로 풀어냈다.
대한민국 이야기 정원 곳곳에서는 전통 공연도 이어졌다. 판소리와 대금 연주가 정원 사이를 채우며 공간의 의미를 더했다. 서양인의 시선으로 해석한 거북선도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거북선 형태를 그대로 옮기지는 않았다. 대신 푸른색 카마시아 꽃잎을 활용해 거북선이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는 장면을 연출했다.
◇ 자연과 건축의 조화
현대정원에서 인상적인 장소 중 하나는 원형 미로 공간인 '니체의 미로'였다. 좁고 굽은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소나무가 심긴 탁 트인 원형 공간이 나타난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까지 더해지면서 작은 야외 공연장 같은 장면이 만들어졌다. 이곳에서는 클래식 바이올린 연주가 열렸다.
연주자는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포함해 두 곡을 들려줬다. 연주가 끝나자 때마침 소나무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며 '솨아' 하는 소리를 냈다. 누군가 "소나무가 박수를 친다"고 말했다. 사람의 박수가 끝난 뒤 숲이 한 번 더 답하는 듯한 순간이었다.
현대정원 가장 높은 곳에는 '위버하우스'가 자리 잡고 있다. 칠레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부부 건축가 마우리시오 페소와 소피아 본 에릭사우센이 설계한 독창적인 건물이다. 넓은 바둑판 같은 공간 위로 16개의 기둥이 솟아 있다. 현대정원 개관과 함께 위버하우스에는 레스토랑도 문을 연다. 대한민국 요리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고 있는 이동희 셰프가 이끄는 공간이다. 정원에서 자란 식재료를 식탁으로 옮겨 모던 한식으로 풀어내는 방식이다.
◇ 한국의 풍류 알려준 한국정원
현대정원을 둘러본 뒤 한국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국정원은 7천여 평 규모다. 정원 측은 100년 가까이 끊긴 한국 전통 정원의 맥을 잇고, 이를 문화유산으로 키우기 위해 한국정원을 조성했다고 설명했다. 한국정원은 '민초들의 삶', '선비들의 풍류', '한국인의 정신'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구성됐다.
숲길과 연못, 서원과 암자가 이어지며 한국식 정원의 절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화려하게 꾸미기보다 주변 산세와 물길을 정원 안으로 끌어들인 공간이다. 한국정원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축은 승효상이 설계한 선곡서원이다. 선곡서원은 안동 병산서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공간이다. 선곡은 메덩골의 한자 이름이다. 건물은 자기 모습을 드러내기보다 주변의 숲과 물, 하늘을 안으로 불러들이는 듯했다. 꺾인 건물 사이에 놓인 물은 미풍에 흔들리며 잔잔한 파문을 만들었다.
선곡서원 앞 바위정원은 서애 류성룡을 따르던 병산서원 제자들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을 발탁한 인물이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징비록'을 써 전쟁의 전 과정을 되짚었다. 바위정원에서 가장 묵직한 큰 바위는 서애 선생을 나타낸다. 주변의 작은 바위들은 제자들을 표현했다. 모범생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구석에 모여 노는 학동들은 작은 돌 서너 개로 표현했다. 이 바위정원은 석장계 명인 이시희 선생의 작업이다.
◇ 숲속 정원 채운 수준 높은 공연
한국정원의 압권은 '용반연'이라는 연못과 그 주변이다. 용이 머무는 형상을 뜻하는 용반연은 조정에서 물러나 낙향한 선비들이 머물던 연못을 빗댄 이름이다. 잔잔한 수면 위로 하늘과 나무가 비치면 풍경과 사유가 한 화면에 담긴다. 용반연을 바라볼 수 있는 정자에서는 연희단 팔산대의 공연이 펼쳐진다.
판소리 심청가가 연못과 소나무 숲 사이로 흐르자 정원은 그대로 살아 있는 무대가 됐다. 연희단 팔산대는 판소리와 무용, 산조 등 우리 고유의 소리와 몸짓을 선보이는 그룹이다. 국빈·정상급 행사에서 공연을 펼칠 정도로 기량을 인정받고 있다. 용반연에서 뛰노는 물고기를 자세히 보니 산천어였다. 1급수에서 사는 산천어를 이곳에서 마주한 것도 뜻밖이었다.
파청헌과 정자 주변은 사진 명소로도 알려져 있다. 대청마루와 처마, 연못과 소나무가 한 장면에 들어와 한국정원의 단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현대정원과 한국정원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지만,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현대정원은 니체와 플라톤을 숲으로 끌어들이고, 한국정원은 서원과 암자, 바위정원과 판소리로 한국적 사유를 보여준다.
메덩골정원 측은 "방문객이 단순히 꽃과 나무를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철학적 사유를 경험하는 지적 여정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메덩골정원이 있는 양동에는 중앙선 양동역이 지난다. 역 주변에는 한적한 마을과 양동쌍학시장이 있다. 양동은 부추로도 이름난 곳이다. 시장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을미의병교'라는 이름의 다리도 만난다. 작은 다리 이름 하나가 이곳의 역사를 다시 일깨운다. 석불역과 구둔역도 양동 여행의 기억을 보태는 장소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6년 6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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