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창
| 2026-08-08 07:01:02
(충주=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양떼구름 사이로 한여름 태양 빛이 쏟아져 내리고 거뭇거뭇 이어진 산등성이가 하늘색과 물색의 경계를 그리는 7월의 오후.
불현듯 호수 수면에 출현한 악어 떼를 보고 깜짝 놀란다.
봉우리에 올라 내려다보면 호수와 맞닿은 산자락이 악어 형상을 하고 있다고 이름 붙은 충주 악어봉이다. 개방한 지 2년이 채 안 된 따끈한 신상이다.
충북 충주에는 생각보다 볼 게 많다. 그래도 일단 충주호를 보고 싶었다.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생긴 국내 최대 규모의 인공호수. 충주ㆍ제천ㆍ단양에 걸쳐 있어 '내륙의 바다'로 불리는 곳. 단양팔경, 월악산국립공원 등 수려한 볼거리들이 많은 곳. 이 정도만으로도 1순위 목적지로 손색이 없다.
이왕 볼 거 제대로 보기 위해 유람선을 탔다.
◇ "중국의 소상팔경이 이보다 나을까"
유람선은 제천 청풍나루에서 장회나루까지 갔다가 돌아온다. 1시간 30분이 걸린다.
배가 미끄러지듯 물길을 헤치고 나아가니 저 멀리 월악산 영봉이 구름에 닿을 듯 아련하고 복숭아가 많이 자라 도화리라 불리게 됐다는 작은 마을이 옆을 스치고 지나간다.
얼마 안 가 꽤 큰 현대식 다리가 보인다. 단양팔경 중 하나인 옥순봉(286m)의 이름을 빌려왔다는 옥순대교다.
충주댐 건설 전에는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나루터였다는데, 지금은 대교 위에 오르면 충주호의 절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가 됐다.
배 위에선 금수산 독수리바위도 감상할 수 있다. 큰 바위 위에 작은 바위가 얹어져 마치 독수리의 머리와 부리처럼 보인다.
유람선에서 바라보는 충주호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구담봉(330m)이 아닐까.
물속에 비친 바위가 거북 형태를 하고 있어 이름 붙여진 구담봉은 수많은 문인이 그 비경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명승이다.
옥순봉과 함께 유람선에서 볼 수 있는 두 개의 단양팔경 중 하나다.
퇴계 이황은 "중국의 소상팔경이 이보다 나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택리지'의 묘사는 구체적이다. "구담은 청풍에 있는데 양쪽 언덕에 석벽이 하늘 높이 솟아 해를 가리었고 그 사이로 강물이 쏟아져 내린다. 석벽이 겹겹이 서로 막혀 문같이 되었는데, 좌우로 강선대·채운봉·옥순봉이 있다."
유람선 갑판 위엔 정오의 열기가 뜨겁다. 선실 안은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물길 따라 병풍처럼 이어지는 동양화 연작을 놓칠 순 없었다.
흐르는 땀을 닦아가며 보고 또 봐도 참으로 신기한 호수 위 봉우리들을 감상했다.
오래전 배를 타고 노르웨이의 송네피오르를 구경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지인이 "충주호랑 비슷하던데"라고 해서 웃은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그 말이 송네피오르가 별거 아니라는 뜻으로 들렸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만큼 충주호를 높이 평가했던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호수로 모여든 악어 떼
이번 탐방의 목적은 사실 악어봉에 오르는 일이다. 야생동물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일반인들의 접근이 어려웠던 이곳은 2024년 9월 공식 개방됐다.
산 밑 카페 주차장에서 걸어서 30분 정도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너무 쉽게 생각했다.
한낮 기온은 최고 34도까지 치솟았고 바위투성이 길은 생각보다 가파르고 험난했다.
비 오듯 쏟아지는 땀에 겉옷까지 흠뻑 젖었고 평소 유산소 운동을 게을리한 몸은 쓰러질 듯 늘어졌다. 오기 하나로 버티며 올랐다.
정상에 오른 순간, 아마도 이곳에 온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올라오길 잘했다'고.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광경이 펼쳐졌다. 충주호의 한복판으로 모여드는 악어 떼들의 형상 그대로다. 드라마틱한 뭉게구름과 어우러져 충주호는 순간 초현실적인 그림으로 변신했다.
고대 이집트 신화에 등장하는 악어의 신 '소베크'(Sobek)는 나일강의 수호신이다. 악어를 신격화한 존재로, 강물에 비옥함을 주어 농업을 번성하게 하는 신이었다. 이후 오랜 세월 악어는 힘과 권력을 상징하는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다.
남한강에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연간 33억8천만t의 용수를 수도권과 충북ㆍ강원 일부 지역에 공급할 수 있게 됐지만, 동시에 충주ㆍ제천ㆍ단양 3개 시군 101개 마을이 물에 잠겨 7천100여 가구, 3만8천여명이 고향을 잃었다.
충주호의 절경을 즐겨 감상하면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떠올린다.
충주호가 중부 지방에 생명과도 같은 물을 공급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 많은 사람이 삶과 기억의 터전을 상실했다는 사실.
악어봉에 앉아 있으니 어디선가 한줄기 청량한 바람이 불어왔다.
내려오는 길. 올라갈 때 못 봤던 나무들이 보였다. 바위틈에 외롭게 선 소나무와 비탈길에 위태롭게 늘어선 키 큰 신갈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 밑으로 키 작은 쥐똥나무, 생강나무, 국수나무는 마치 소나무와 신갈나무를 응원하듯 줄지어 자라나고 있었다.
◇ 잃는다고 잊을 순 없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을 보러 갔다. 통일신라기(8세기 후반∼9세기 초로 추정)에 세워졌고, 신라 석탑 중 유일한 7층 석탑이다. 당연히 국보다.
탑의 높이가 12.95m로 늘씬하게 길게 뻗은 탑신을 보고 있으면 하늘을 찌를 듯한 상승감에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바로 옆 탄금호 무지개길도 밤에 오면 근사한 야경과 함께하는 운치 있는 데이트 코스가 아닐까.
충주에 왔으면 탄금대는 들러야 한다. 무엇보다 그곳에 가면 왠지 충주호와 악어봉에서 가졌던 느낌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탄금대는 우리나라 3대 악성 중 하나인 우륵이 신라 진흥왕 때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다. 그래서 탄금대다.
우륵은 원래 가야 사람이다. 가야가 멸망하자 이곳에 강제로 이주당한 실향민이다. 우륵은 당시 탄금대 절벽 바위 위에서 남한강의 풍광을 감상하며 가야금을 탔다고 한다.
주차장부터 소나무 숲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아무도 걸음을 재촉하는 이 없는 최고의 산책길이다.
터벅터벅 오 분쯤 걸었을까. 남한강이 보이는 곳에 이르자 신발을 벗고 오르면 절로 노랫가락이 들릴 것 같은 탄금정이 나타났다. 풍류는 이런 곳에서 논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계단을 더 내려가니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나무 데크로 꾸며져 있고 그곳에 왠지 어울리지 않는 묵직한 바위가 앉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신립 장군이 전투 중 뜨거워진 활시위를 식히기 위해 이곳 바위 절벽을 열두 번이나 오르내렸다고 해서 열두대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다. 신립 장군은 패전 후 이곳에서 투신했다.
돌아오는 길. 주차장 바로 옆에 둥근 석조 작품이 하나 보였다. 들어갈 땐 못 봤던 돌이다. 제목은 망부석(望夫石)이었다. 멀리 떠난 남편을 애타게 기리던 아내가 그 자리에서 돌이 됐다는, 그 망부석이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 그래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그리움과 기다림. 고향도, 나라도, 임도, 잃어버린다고 잊혀지는 것은 아니다.
(Tip)
▲ 청풍나루 유람선은 '충주호크루즈 청풍나루' 홈페이지(https://www.chungpoongho.co.kr/)에서 예매할 수 있는데, 운항 여부는 계절, 기상 상황, 모객 부족 및 선사 사정 등에 따라 취소 또는 변경될 수 있는 만큼, 사전에 전화 등으로 연락해보는 게 좋다. 7월 현재는 평일 하루 4회, 주말 7회 운항하고 있다.
요금은 성인(왕복) 1만9천원인데, 온라인으로 예약하면 2천원을 할인해 준다.
▲ 악어봉은 카페 '게으른 악어' 주차장에 무료로 차를 세우고 올라갈 수 있다.
▲ 탄금대는 입장과 주차가 모두 무료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6년 8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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