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창
| 2026-09-02 07:00:07
(논산=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진분홍 백일홍 꽃잎 너머로 잿빛 한옥 기와지붕이 정갈하다.
그 밑에 '이은시사'(離隱時舍)라는 현판이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떠날 때와 머물 때를 아는 사람이 사는 집' 논산 명재고택에 배롱나무꽃이 활짝 폈다.
피고 질 때를 아는 꽃의 순리(順理)를 눈앞에서 보고 쓴 글일지도 모르겠다.
한옥의 품격은 집 자체만으로 어림잡아서는 안 될 일이다. 이는 집을 둘러싼 자연과 어울림 속에서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연못이 터질 듯 탐스러운 연꽃을 피워내고, 매끈한 배롱나무 가지가 분홍색 꽃잎을 토해내는 한여름 오후. 고택은 '공존의 미학'을 가르치는 산 교과서가 된다.
◇ "분수에 넘치는 집"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 있는 명재고택은 조선 숙종 때 학자인 명재(明齋) 윤증(1629∼1714)의 자녀와 제자들이 윤증을 위해 지은 집이다.
그런데 정작 윤증은 단 한 번도 이 집에 살지 않았다. 그는 완공된 집을 보고 "내 분수에 넘치게 과하고 화려하다"며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인근 초가에 살았다.
'소론'의 영수로 학문이 뛰어나 여러 벼슬에 천거됐지만, 평생 이를 마다하고 재야학자로 남았던 윤증은 집마저도 '자신이 머물 곳'을 결정하고 끝까지 학자다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사연 때문에 이 집에 쓰인 한자는 흔히 오래된 집을 뜻할 때 쓰는 '옛 고(古)' 대신, '연고 고(故)'를 사용해 고택(故宅)이라 적습니다. 단순히 낡은 집이 아니라, 사연(연고)이 서려 있는 집이라는 뜻이죠."
김경란 논산시 문화관광해설사의 말이다.
◇ 베르누이의 정리
고택 곳곳엔 단순한 지혜를 넘어서는 과학이 있다.
집 앞 연못은 노성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담아두는 일종의 저수지이고, 여름에는 후텁지근한 남풍의 온도를 낮춰주는 역할도 한다.
집 내부를 보면 안채와 광채 사이의 좁은 길이 백미다. 북쪽인 뒤뜰로 향할수록 폭이 좁아지는데 이는 깔때기처럼 단면적이 큰 곳에서 작은 곳으로 흐르면 속도가 빨라지고 압력은 낮아진다는 '베르누이의 정리'를 활용한 것이다.
즉 여름에는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북쪽의 좁은 통로를 거치면서 속도가 빨라지고 기온이 떨어지게 되며 반대로 겨울엔 차가운 북풍이 이 사이를 통과하며 속도가 느려지게 된다.
고택 사랑채의 4짝 문의 작동 방식은 현대의 최신식 시스템 창호를 능가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문을 옆으로 밀면 겹치고 그 겹친 문을 다시 통째로 잡아당기면 활짝 열린다. 미서기와 여닫이의 기능을 합친 문이다. 공간을 나눌 때는 벽이 되고 합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두 방을 완벽한 하나로 연결한다. 이 문의 이름은 '안고지기'다.
사랑채 앞 돌계단 위 바닥엔 '일영표준'(日影標準)이라고 새긴 글씨가 보인다. 윤증의 9대손인 윤하중이 개발한 24시간제 해시계의 관측지점이다.
◇ 바람 같은 미소
사랑채 누마루의 창을 전부 열고 앉아서 창밖을 바라볼 호사를 잠시 누렸다.
밖은 한여름 열기에 붉은 꽃잎이 녹아내릴 듯한 폭염이었지만, 근사한 정자로 변한 누마루 위는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이마의 땀이 식고 있었다.
백일홍 꽃잎의 아련한 잔상이 마파람에 실려 문턱을 넘어왔다.
윤증의 13세손인 윤완식 씨는 창문 하나하나가 액자가 되는 차경(借景) 감상에 할 말을 잃은 필자에게 "다른 생각이 나느냐"고 물으며 웃었다. 그의 미소가 바람 같았다.
누마루 창틀에 바투 다가서 밖을 바라봤다.
배롱나무 뒤로 큰 키의 고욤나무가 싱그럽게 솟아있고 앞으로는 금강산을 형상화한 아담한 석가산(石假山)이 고택 주인의 고매한 풍류를 엿보게 한다.
이때 뒤늦게 알았다. 이 집에 담이 없다는 것을. 세상과 막힘없이 소통하겠다는 철학의 소산이다.
고택을 둘러보면 곳곳에 작지만 세심한 배려와 지혜가 스며 있음에 놀라게 된다.
중문 앞 벽 아래쪽은 높이 30㎝가량의 틈이 있는데 안채 아낙네들이 틈을 통해 손님의 신발을 보고 방문자의 신분과 성별을 파악하도록 한 장치다.
화장실은 안채 왼쪽 끝, 살짝 높은 곳에 있다. 여성의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시대에 집안 여자들이 화장실에 다녀올 때 잠시나마 담장 밖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 항아리 진풍경
명재고택은 동학농민혁명과 한국전쟁 당시 불에 탈 위기에 처했었다.
동학혁명 때는 농민군이 집을 공격하려고 하자 마을 주민들이 몰려와 "이곳은 탐관오리의 집이 아니라 평생 베풀며 산 선비의 집"이라고 설득했다.
한국전쟁 때는 고택이 인민군 중대 본부로 사용되면서 폭격 대상이 됐지만, 역시 마을 사람들의 만류로 화를 면했다.
오랜 세월 실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공존의 철학 덕택이 아닐 수 없다.
고택의 동편 작은 언덕에 올랐다.
보호수인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 줄지어 늘어선 수백개의 항아리들이 진풍경이다. 윤씨 종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300년 묵은 장맛은 유명하다.
언덕에서 집 쪽으로 내려오는데 8월의 태양 빛에 반짝이는 항아리들의 근육질 몸통이 고택의 기와지붕, 무성한 느티나무 가지와 어울려, 보는 위치에 따라 다채로운 풍광을 만들어 냈다.
◇ 새봄, 맘이 설렐 땐…
종학당으로 향했다. 고택에서 멀지 않은 종학당에도 배롱나무꽃이 한창이다.
김경란 해설사는 "긴 겨울이 지나고 봄에 꽃이 피기 시작하면 설레서 어딘가 가고 싶어지잖아요. 그땐 여기에 오면 돼요"라고 했다.
3월 문턱을 넘어서면 산수유, 청매화, 홍매화가 흐드러지게 핀다고 했다.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백일홍이 연이어 꽃을 피우니 연중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을 무색하게 하는 꽃 잔치를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곳은 다름 아닌 파평 윤씨 문중 서당이다. 윤증의 큰아버지인 윤순거(1596∼1668)가 문을 열고 대대로 친가와 외가 자녀들을 합숙 교육한 곳이다. 문과 42명, 무과 31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했다.
김 해설사는 "수준별 교육을 했고, 공부에 재질이 없는데 운동을 잘한다면 무과 시험을 준비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공부만 하라고 강요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이곳엔 초급과정인 종학당, 고급과정인 백록당, 기숙사인 보인당, 그리고 누각인 정수루가 있다.
서당에 누각은 왜 있는 걸까. 위에 올라가 봤다. 눈앞에 저수지가 펼쳐져 있고 그 너머에 파평 윤씨 선산과 재실이 보였다.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풍광이다.
과거시험을 앞둔 학생들이 누각에 올라 어떤 마음을 갖게 될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 "내가 만물을 해치면 만물도 나를 해칠 것"
종학당 바로 옆엔 2022년 10월 개원한 한국유교문화진흥원이 있다.
도서관, 강연장, 전시장, 카페도 있는 이곳에 더위를 피하고 목이나 축이자고 들어갔는데, 더없이 진귀하고 감동적인 전시를 봤다.
'더 커넥터(The Connector): 세계관의 확장'은 고리타분하다는 이미지를 줘 온 유교가 퇴계 이황의 사상에서 시작해 실학사상을 거쳐 오면서 '공존'과 '연결'의 값진 철학적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전시다.
"만물은 서로 이어져 있어, 내가 만물을 해치면 만물 또한 나를 해칠 것이다."(다산 정약용)
그 어떤 현대적 생태주의보다도 압축적이고 선진적인 실학자들의 사상을 영상과 함께 접하고 나면 명재고택과 종학당에서 얻은 깨달음이 어느새 실천에 대한 다짐으로 변해가는 걸 느낄 수 있다.
돌아오는 길, 명재고택을 마다한 윤증이 학자의 삶을 마감했던 곳이자, 그의 영장을 봉안한 유봉영당(酉峰影堂)에 들렸다.
가을까지 석 달 열흘 넘게 피고 지고를 반복해 백일홍(百日紅)이라고도 부르는 배롱나무꽃은 여기도 만개했다.
이곳의 꽃과 그 향기는 명재고택보다, 종학당보다, 더 크고 진했다.
[Information]
◇ '더 커넥터(The Connector): 세계관의 확장'
문화체육관광부 주최로 한국유교문화진흥원에서 열리고 있는 이 전시는 유교문화의 깊은 뿌리 아래 흐르는 '공존'과 '연결'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구성한 융복합 특별전이다.
1부는 조선 화가들의 따뜻한 필치로 그려낸 영모화와 초충도를 통해 인간과 함께 고통의 무게를 나누는 생명들의 온기를 마주한다.
2부는 우주적 관점에서 자연을 다룬 영상을 통해 인류의 현재를 성찰한다.
마지막으로 3부에서는 런던과 취리히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현대미술작가 엘리 허경란의 미디어 아트를 선보인다.
전시를 기획한 박정언 한국유교문화진흥원 연구위원은 "유교의 인(仁)은 고통받는 모든 존재에 응답하는 지극한 측은지심"이라며 "여러분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잇는 '커넥터'가 되어 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11월 29일까지.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6년 9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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