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경
| 2026-10-05 07:00:10
(태안=연합뉴스) 이동경 기자 = 낮과 밤에 판이한 색채의 무대가 펼쳐지는 태안의 흥미로운 두 곳을 찾았다. 낮에는 팜파스그라스와 핑크뮬리가 은빛, 핑크빛으로 일렁이고 땅거미가 지면 붉디붉은 낙조가 물드는 곳이다. 그토록 이채로운 풍경을 엮어본다.
◇ 간척지를 낀 수목원
태안군 남면의 안면도로 향하는 길목에 면적이 13만여㎡(4만평)에 달하는 청산수목원이라는 곳이 있다. 현대그룹 정주영 선대 회장이 바다를 메운 간척지와 주변의 탁 트인 농경지가 이 수목원의 배경이다. 수목원 입구에는 황금에메랄드 나무가 경비병처럼 나열해있다.
이어 황금삼나무와 낙우송 등이 가지런히 심어진 터널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홍련원과 수련원 등 연꽃이 자리 잡은 아기자기한 연못들이 반긴다. 그리고 이내 팜파스 무리가 등장한다.
◇ 조생 팜파스 이삭의 속삭임
핑크빛을 살포시 머금은 팜파스 군락을 배경으로 열성 유튜버들이 영상을 찍고 있다. 팜파스는 이름부터 이국적이다. 남미 팜파스 초원에서 건너온 이 억새류 식물은 키가 사람 어깨를 훌쩍 넘기고 이삭은 풍성한 깃털처럼 부풀어 오른다.
이삭들이 서로 속삭이기라도 하듯이 가을바람에 어깨를 부딪치며 살랑인다. 이삭은 꼬리 모양의 커다란 크림빛 또는 연갈색 깃털이라고 표현하면 될까. 볏과에 속하는 이 식물은 8~10월에 꽃이삭을 맺는다. 분홍색, 크림색 등 다양한 색상을 가진 7가지 품종이 있다. 깃털 뭉치는 하나의 낱알이 아니다. 여러 개의 작은 꽃이 모여 이룬 '꽃차례'(화서)다.
◇ 자태 뽐내는 연분홍 핑크뮬리
핑크뮬리도 근처에서 자태를 과시한다. 핑크뮬리의 분홍빛은 팜파스의 은빛과 색감의 대비가 절묘하다. 멀리서 보면 마치 핑크빛 구름이나 안개가 낀 것 같은 몽환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가을에 몽글몽글 안개처럼 이삭이 피어오르는 핑크뮬리는 북미가 원산지인 여러해살이 볏과 식물이다.
그러나 아직은 색채가 연분홍이다. 추석을 전후해 진분홍 색채를 자랑할 터다. 가을 명소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이 억새류는 아직 절정에 오르기 전이다. 색이 점점 짙어지는 중이라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만개하기 전, 초록과 분홍이 뒤섞인 시기의 핑크뮬리는 오히려 섬세한 인상을 준다. 균일한 분홍 물결보다 색이 번져가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풍경이다.
◇ 수줍은 홍가시 잎사귀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팜파스는 '메인이 아니다'라는 수목원 신형철 대표의 말에 또 다른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신 대표는 군청 공무원 시절 농가를 지나가다 우연히 팜파스를 보고 10주를 사 와서 옮겨심으면서 점차 늘렸다고 한다. 가지치기를 한 곳에 수줍게 빨간 잎사귀를 군데군데 내밀고 있는 홍가시나무 숲과 미로정원을 지난다. 봄이 되면 온통 새빨갛게 옷을 갈아입을 홍가시를 상상해본다.
수목원 곳곳에는 밀레의 정원, 고흐 브릿지, 모네 연원 등 유명 화가의 작품을 인용한 조형물들이 이채를 띤다. 수목원 조성의 기틀을 마련하고 7년 전 세상을 달리한 신 대표 형님의 철학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 키 큰 팜파스 그라스에 파묻히다
드디어 그 키가 3m는 훌쩍 넘어 보이는 중생종 팜파스 군락이 떡하니 모습을 드러냈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자매가 군락을 배경으로 포토 타임을 만끽하고 있다. 두 자매의 몸은 완전히 이식 사이에 파묻힌다. 군락은 고개를 들어야 겨우 하늘이 보일 정도의 위용을 과시한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흰빛과 상아색이 뒤섞인 이삭들이 일제히 바람에 몸을 맡긴다. 카메라 파인더 안에서 팜파스는 배경이 아니라 주인공이다. 역광을 받을 때 이삭 하나하나가 솜털처럼 빛난다. 팜파스가 굵고 풍성한 붓질이라면, 핑크뮬리는 가늘고 촘촘한 색연필 선에 가깝다. 이 대비가 이곳 풍경의 핵심이다.
◇ 놓치지 말아야 할 10월
신 대표는 5년 전 뉴질랜드에 관광을 갔다가 알파카라는 '순한 동물'을 본 뒤 호주에서 12마리를 수입했다. 정적인 수목원에 동적인 것을 가미하기 위해서란다. 알파카 식구는 지금 17마리가 됐다. 팜파스와 핑크뮬리가 더없이 풍성한 '협연 무대'를 여는 시기는 10월 초쯤이다. 놓치지 말아야 할 시점이다. 혹시 이곳에서 웨딩 화보를 찍고 싶은 예비 신혼부부들은 촬영 허가를 받을 수 있을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수목원 입장료만 내면 촬영은 간섭하지 않는다.
◇ 가슴 설레는 기다림
수목원에서의 오후가 저물어갈 즈음, 안면도 꽃지해변으로 향한다. 태안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름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이다. '꽃지'라는 이름부터 낭만적이지만, 이곳을 전국구 명소로 만든 것은 할미·할아비바위다. 밀물 때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처럼 보이다가 썰물이 되면 백사장과 이어져 걸어갈 수 있다.
이 두 바위 사이로 해가 떨어지는 순간이 꽃지 낙조의 절정이다. 노을이 시작되기 두어 시간 전부터 해변에는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삼각대를 세운 사우(寫友)들, 자리를 편 가족들,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까지. 저마다의 방식으로 모두 같은 하늘을 기다린다.
◇ 할미·할아비바위의 실루엣
해가 수평선 가까이 내려올수록 하늘의 색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변한다. 옅은 주황에서 진한 다홍으로, 시시각각 색을 달리하는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모두가 셔터를 눌러댄다.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 사이로 해가 걸리는 시각은 계절마다 조금씩 다르다. 두 바위의 실루엣이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검게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처음 이곳을 찾은 이들에게는 충분히 극적이다. 바다로 나간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된 아내, 그리고 뒤늦게 돌아와 아내 곁에서 함께 굳어버린 남편. 매일 저녁 해가 그 사이로 떨어지는 이유를 이 전설만큼 그럴듯하게 설명해주는 것도 없다.
◇ 초승달과 금성, 경이로운 포착
꽃지의 낙조는 해가 완전히 잠긴 후가 진짜 무대일 수도 있다. 해가 모두 가라앉고 하늘의 잔광이 서서히 짙은 남색으로 바뀌는 순간까지 지켜보라. 낙조를 온전히 즐기는 방법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남색 하늘 한쪽에서 뜻밖의 장면 하나를 카메라에 담았다.
가느다란 초승달 바로 위에 유난히 밝은 별 하나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그건 별이 아니라 금성이었다. 마침, 이 무렵 달이 금성 바로 앞을 스쳐 지나가며 두 천체가 하늘에서 가장 가까이 붙어 보이는 천문 현상의 시기와 겹친 것이다.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 사이로 해가 내려앉고,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초승달과 금성이 나란히 떠오르는 하늘이라니. 낙조 하나로도 벅찬 풍경에 덤으로 하늘의 쇼까지 얹힌 셈이었다.
◇ 하루에 담은 태안의 색채들
팜파스와 핑크뮬리의 은빛·핑크빛 협연, 꽃지의 붉은 낙조. 하나는 낮의 화려한 색채이고, 다른 하나는 저녁의 극적인 붉음이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핑크뮬리의 색은 더 짙어질 것이고, 낙조는 조금씩 더 일찍 찾아올 터다. 억새들 이삭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을 보고, 해변에서 그 해가 떨어지는 순간을 보는 것. 그것이 태안 가을 여행의 완전한 하루가 아닐까. 팜파스와 핑크뮬리 축제는 11월 말까지 이어진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6년 10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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