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zine] '신(神)들의 휴양지' 크로아티아 ⑤ 자그레브

역사와 감성이 숨쉬는 매력적인 수도…박물관·넥타이의 도시

권혁창

| 2026-06-06 07:00:12

▲ 자그레브 돌라츠 시장 [사진/권혁창 기자]
▲ 크로아티아 최초의 왕 토미슬라브 동상과 자그레브 아트 파빌리온 [사진/권혁창 기자]
▲ 자그레브 트칼치체바 거리의 '창가의 여인' 동상 [사진/권혁창 기자]
▲ 자그레브 크라바타 넥타이 상점 [사진/권혁창 기자]
▲ 세계에서 가장 짧은 푸니쿨라 '우스피냐차' [사진/권혁창 기자]
▲ 자그레브 구시가지 거리 [사진/권혁창 기자]
▲ 자그레브 식물원 [사진/권혁창 기자]
▲ 자그레브 성 마르크 성당 [사진/권혁창 기자]
▲ 자그레브 미로고이 묘지 [사진/권혁창 기자]
▲ 자그레브 미로고이 묘지 [사진/권혁창 기자]

[imazine] '신(神)들의 휴양지' 크로아티아 ⑤ 자그레브

역사와 감성이 숨쉬는 매력적인 수도…박물관·넥타이의 도시

(자그레브=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자그레브의 반 옐라치치 광장. 트램 정거장 앞 벤치에서 그 큰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도 20분쯤 더 앉아있었다.

그 사이 파란색 트램이 몇번쯤 앞을 지나쳤을까. 타고 내리고 어디론가 걸어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이 광장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지도 상상해본다.크로아티아 여행의 마지막 여정인 수도 자그레브다.

도시의 주인은 사람이고, 그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는 건 도시를 관찰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 '창가의 여인'

자그레브 관광은 모두 반 옐라치치 광장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이 광장의 위치만 잘 파악해 놓으면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광장 바로 옆 돌라츠 시장도 광장의 연장선에 있다. 상인들이 직접 기른 과일과 채소가 끝없이 펼쳐진 가판대, 그 위로 솟은 새빨간 천막과 옆을 지나는 파란 트램의 보색 대비가 선명하다.

흥정하는 젊은 상인과 아주머니, 뭘 살까 두리번거리는 노인, 그 사이로 아이들은 엄마 손을 놓고 달린다. 여느 곳과 다르지 않은 정경도 여행자에겐 흥미롭다.

모퉁이를 돌면 카페와 레스토랑이 모여있는 트칼치체바 거리다. 노천 테이블은 먹고 마시는 사람들도 빽빽하다.

이 거리 중간쯤에 '창가의 여인'이라는 이름의 특이한 청동 조각상이 하나 있다. 이 여인은 매춘부다. 20세기 초 이 거리가 홍등가였음을 기억하기 위한 동상이다. 이 도시에선 매춘의 역사도 기억되고 있었다.

구시가지를 걷다 보면 '크라바타'(Kravata)라는 이름의 작은 상점에 초대형 넥타이가 걸려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곳에서 넥타이 상점이 특별한 건 넥타이의 종주국이 바로 크로아티아이기 때문이다. 17세기 '30년 전쟁' 당시 크로아티아 용병들이 전쟁터로 떠날 때 아내들이 무사 귀환을 기원하며 남편의 목에 붉은색 천을 감아준 것이 넥타이의 시초다.

◇ 실연 박물관

반 옐라치치 광장에서 서쪽으로 조금 가면 언덕 밑에 푸니쿨라(궤도열차)가 있다. '우스피냐차'라는 이름의 이 열차는 궤도 길이가 66m로 세계에서 가장 짧은 푸니쿨라로 알려져 있다.

걸어가는 게 더 빠를 수도 있지만, 계단 경사가 가파르기 때문에 여전히 유용한 교통수단이다.

푸니쿨라를 타고 언덕 위에 오르면 바로 앞에 자그레브의 명물인 로트르슈차크 탑이 우뚝 서 있다. 13세기 몽골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운 것으로, 방어시설 중 유일하게 남은 중세 시대 탑이다.

이 탑이 유명한 건 매일 정오에 지금도 성 위에서 대포를 발사하기 때문이다. 12시가 가까워져 오면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시민들은 대포 소리를 듣고 정오가 됐음을 확인한다.

멀지 않은 곳에 화려한 타일 지붕으로 유명한 성 마르크 성당이 있고, 그 앞에 크로아티아 나이브 아트 뮤지엄이 있다.

이 뮤지엄은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데, 아마추어라고 무시하면 오산이다. 소박하지만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기풍의 그림들을 감상할 수 있다.

자그레브에는 특이한 박물관들이 많다.

사랑의 잔해를 모아놓은 '실연 박물관', 술 마신 다음날의 흑역사를 모은 '숙취 박물관', 옛 유고슬라비아로의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80년대 박물관'도 있고, 착시 박물관, 초콜릿 박물관도 있다.

실연 박물관에 들어갔다. 오래된 편지, 인형, 신발, 커피잔… 전 세계에서 헤어진 연인들이 남긴 물건과 익명의 사연들이 전시돼 있다. 한국 제주도에서 온 사연도 있다.

거대한 유물이 아니라 감정과 기억, 경험도 전시물이 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박물관이 아닐까.

◇ 집보다 화려한 묘지

자그레브는 2020년 3월 발생한 지진으로 15조원이 넘는 피해를 당했다. 자그레브 대성당을 비롯해 많은 유명 건물이 지진으로 파손돼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이다.

대성당에 들어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동묘지라는 미로고이(Mirogoj) 묘지를 찾았다.

묘지라기보다는 멋진 조각 공원이었다. 도시의 건축물보다 더 화려하다.

곳곳에 '영생'을 상징하는 사이프러스가 하늘을 찌를 듯 줄지어 서 있다.

크로아티아 신화에서 나무는 주로 지하 세계와 하늘을 연결하는 축의 역할을 한다.

멀지 않은 과거에 참혹한 전쟁을 겪은 크로아티아 사람들에게는 현생보다 죽음 이후의 세계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6년 6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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