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창
| 2026-10-07 07:01:02
(춘천=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은행잎 끝자락이 노래지길 기다릴 수 없었다.
너덜거리는 달력의 숫자만으로 가을 문턱을 살짝 넘은 날.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라는 한 시인의 말을 믿고 열차에 올랐다.
잿빛 하늘, 가을비 머금은 공지천 조각공원이 생생하다. 조각작품도 비가 필요하다. 나무처럼.
◇ 기울기 36.5도
각각 다른 재료로 만들어진 인간 모형 3개가 삼각형 구도로 서 있다. 아니 앞으로 기울어져 있다. 기울기는 36.5도. (김지현)라는 제목의 이 기묘한 작품 앞에 섰다.
앞으로 쏠린 모습에서 속도와 위기가 감지된다. 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더 기울어질까. 앞으로 쓰러질까. 쏠림을 바로잡고 일어설까.
첫 작품부터 긴장감이 흘렀다. 감상은 상상으로 흘러간다.
"이곳에 조각품들이 설치된 게 내년이면 30년이 됩니다. 공원 터가 원래 쑥 들어간 늪지대였는데 공지천 준설작업으로 흙을 퍼 올려 메꿔 공원이 됐습니다."
춘천시 박성수 문화관광해설사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왜 하필 조각작품이죠?"
"1987년부터 춘천 MBC가 한국 현대 조각 초대전을 해 온 것이 그 뿌리가 됐습니다."
"이곳이 원래 빙상장이었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옛날엔 빙상 경기를 호수나 강 같은 곳에서 했죠. 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이곳 공지천에서 경기를 했으니 공원 터가 빙상장이었던 건 틀린 얘기가 아니죠. 춘천이 빙상으로 워낙 유명했어요."
◇ 2000년 6월 13일
그러는 사이 작품 (김승림) 앞에 왔다. A가 B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렸고, 두 사람 발치에 있는 기둥은 무너져 있다.
제목에 있는 숫자에 힌트가 있다. 2000년 6월 13일. 분단 55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날이다. 그로부터 26년의 세월이 무색했다. 남북의 '공존'(共存)과 집권자들의 '공생'(共生)은 다르다.
조형물의 자세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불안하다. 긴장과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조각공원에는 벚나무가 많다. '진짜 봄'에 오면 벚꽃 잎에 물든 조각상을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공원 옆으로 공지천이 흐르고 건너편에 아름드리 메타세쿼이아 숲이 공원을 내려다본다. 가까이 갈수록 이끼로 뒤덮인 수피가 신비롭다.
공지천의 어원은 곰(神)+짓(짓다)+내(川)다. 발원지인 대룡산의 산신이 지어준 물이니, 눅눅해진 숲에서 불쑥 물의 정령이 나타나도 이상할 것 같지 않다.
공지천은 이곳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소양강과 북한강을 만난다. 3개의 물줄기가 만나니 동네 이름이 삼천동이다. 그야말로 물의 도시다.
◇ '이디오피아'
황인자의 와 송광희의 앞에서 기어이 뭉뚝해진 시간들이 엄습했다. 지나간 바람이 남긴 날카로운 표식, 커다란 몸체 앞에 눈을 감고 고개 숙인 여인.
이 두 작품이 어쩌면 한 쌍일지 모르겠다고 마음대로 생각해 봤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 그 흔적을 차마 바라보지 못해 푸르른 날에도 여인은 눈을 감고 있다고.
조각공원에는 순수 조각 작품 외에 소설가 김유정 문학비, '한국 잡지 언론의 개척자' 청오 차상찬 동상, 에티오피아 참전 기념탑 등도 있다.
그러고 보니 에티오피아를 잊고 있었다. 춘천과 공지천이 '젊음'과 '낭만'의 상징처럼 읽히는 데는 에티오피아도 아닌 '이디오피아'가 껌딱지처럼 붙어있으니까.
정리해 보자. 에티오피아의 한국전쟁 참전→양구·화천·철원 전투→1968년 에티오피아 황제의 춘천 방문→에티오피아 황실 커피원두 선물→한국 최초의 로스터리 커피 전문점 '이디오피아집' 탄생….
인스턴트 다방 커피를 마시던 1970∼1980년대 경춘선 열차가 실어 나른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공지천과 커피와 낭만을 하나로 연결했다. 사람들은 그때를 순수와 열정이 지배했던 때라고 믿는다.
◇ 공지어와 무어
공지천 구름다리를 건너면서 박성수 해설사가 들려준 퇴계 이황의 '공지어(孔之魚) 설화'와 이외수 장편소설 '황금비늘' 이야기가 귀에 쏙 들어왔다.
설화는 퇴계가 지푸라기를 잘라 개울에 던지자 그 토막들이 물고기로 변했고 그 물고기를 공지어, 물고기가 살게 된 내를 공지천이라 부르게 됐다는 얘기다.
퇴계가 춘천에 살았다는 기록은 없지만, 퇴계 외가가 춘천 박씨 집안이었다는 점이 이 설화가 퇴계와 엮이게 된 배경으로 보인다.
우화 형식을 띤 소설 '황금비늘'에는 항금빛 비늘을 흩날리며 창공을 헤엄치는, 초월적인 힘을 지닌 물고기 '무어'가 나온다.
물의 도시 춘천 사람들은 상상 속의 물고기에서 '그 무엇'인가를 찾으려 한 것 같다.
◇ 시간여행자
유안진은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라는 시를 썼고, 이순원은 그 제목을 따서 '춘천은 가을도 봄'이라는 소설을 냈다.
유안진은 이렇게 노래했다. '(전략) 春川도 그렇지/ 까닭도 연고도 없이 가고 싶지/얼음 풀리는 냇가에 새파란 움미나리 발돋움할 거라/ (중략) 봄은 산 너머 남촌 아닌 춘천에서 오지/ (중략) 단풍도 꽃이 되지 귀도 눈이 되지/ 春川이니까'
조병섭의 앞에 섰다. 뻥 뚫린 구멍. 그곳은 바람이 지나간 자리다. 그게 생이겠지.
춘천에 오면 공지어도, 무어도, 있을지 모른다. 무엇보다 가을도 봄이니까.
저 멀리 248 출렁다리가 보인다. 그 위로 산등성이에 스며든 자욱한 안개.
김재호의 를 멀뚱히 바라본다. 우리는 모두 시간여행자다. 조각공원에서 빙상장으로, 에티오피아에서 이디오피아로. 가을에서 봄으로.
그런데, 시간여행자라면 한 번쯤은 미래로도 가봐야 하지 않을까.
시간여행을 해본 사람은 알게 된다. 어렴풋한 생의 윤곽을. 바람이 불고 햇살이 비추고 비가 내리는 광경을.
춘천의 봄을 본 사람은 이제 봄뿐 아니라 가을도 알게 될 것이다.
※ 참고 자료
1. 지명의 생성변화와 문화콘텐츠 확산 관련 연구 -춘천시 '공지천' 지명의 스토리텔링 사례를 통해서(2022, 이학주)
2. 춘천 에 나타난 재난의 은폐와 유교주의(2020, 이광형)
3. 춘천 관광 포털(https://www.chuncheon.go.kr/tour/destination/all-tour/detail/?tourId=184)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6년 10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끝)
[ⓒ K-VIBE.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