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Honey] 충(忠)·예(藝)·미(美)의 도시, 통영 스토리

이동경

| 2026-05-13 07:00:08

▲ 한산도 바다[사진/임헌정 기자]
▲ 거북등대와 한산대첩기념비[사진/임헌정 기자]
▲ 수루[사진/임헌정 기자]
▲ 삼도수군통제영에 있는 세병관[사진/임헌정 기자]
▲ 미륵산에서 내려다본 한려수도[사진/임헌정 기자]
▲ 하늘에서 내려다본 동피랑 마을[사진/임헌정 기자]
▲ 동피랑 마을의 벽화[사진/임헌정 기자]
▲ 해저터널[사진/임헌정 기자]
▲ 통영 시내에 있는 벽화[사진/이동경 기자]
▲ 베를린 하우스[사진/이동경 기자]
▲ 도다리쑥국[사진/임헌정 기자]
▲ 다찌한상에 올라온 음식과 충무김밥[사진/임헌정 기자]
▲ 강구안에 정박한 거북선과 판옥선[사진/임헌정 기자]

[여행Honey] 충(忠)·예(藝)·미(美)의 도시, 통영 스토리

(통영=연합뉴스) 이동경 기자 = 세계 4대 해전을 승리로 이끈 충무공 이순신의 얼이 스며있는 곳, 위대한 예술인들이 발자취를 남긴 곳, 동양의 나폴리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항구를 간직한 곳, 그리고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곳.봄에는 통영을 한 번쯤 다녀오는 건 어떨까.

◇ 격전의 바다, 그러나 평화로운 한산도

화요일 오전 9시. 통영항여객선터미널이 아침부터 시끌벅적하다. 한산도, 욕지도, 비진도, 사량도, 소매물도 등 7개 항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터미널 대합실 한 곳에는 낚싯대가 쌓여있다. 통영 주변에는 섬낚시 포인트가 많아 조사(釣士)들이 전국에서 모인다.

점점이 떠 있는 가두리양식장 부표들 사이로 여객선이 15분을 가자 선조 25년(1592년) 8월, 이순신이 왜적을 무찔렀던 그 바다에 이른다. 겉으로 너무나 고요하고 평온하다. 그러나 434년 전 한산대첩의 전운이 가득했던 곳이다. 갑자기 섬뜩해진다.

조선 수군은 학익진 진형으로 맞서 일본 정예 수군의 배 47척을 침몰시켰다. 20여척은 불태우고 12척을 빼앗았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그 형세가 마치 바람 같고 우레 같아, 적의 배를 불태우고 적을 사살하기를 일시에 해치워 버렸다'고표현했다.

배는 1963년 한산만 입구 암초 위에 세워진 '한산도의 상징' 거북등대 옆을 지난다.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의 위용을 계승한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봤던 그 등대다. 거북등대 바로 뒤편 문어포마을 언덕 꼭대기에 한산대첩비가 올려다보인다.

통영항을 출발한 지 25분이 지나자 배는 제승당 선착장에 다다른다. 선착장에서 제승당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다. 해안을 오른쪽에 끼고 호젓한 길을 따라 걷는다. 왼쪽에는 울창한 적송이 군대처럼 대열을 이룬다. 이순신은 거북선과 판옥선 등 군선을 건조할 때 적송을 자재로 썼다.

제승당은 전라 좌수사였던 이순신이 한산대첩에서 대승을 거두고 경상·전라·충청의 수군을 총괄 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후 삼도수군통제영 본영을 두고 작전을 지휘하던 곳이다. 한산도는 먼바다 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요새를 갖추기에 적합한 지형이다.

제승당에 다다랐지만, 오른편에 있는 수루로 먼저 발걸음이 옮겨졌다. 달 밝은 밤은 아니었지만, 저 유명한 이순신의 시 '한산도가'에 나온 대로 기자는 수루에 홀로 앉았다. 그림 같은 풍경 앞에서 한산도가의 시구를 한번 읊어본다. 백척간두의 나라 운명만을 걱정했던 이순신의 충정을 떠올리니 잠시 숙연해졌다.

제승당 내부에는 이순신이 거북선을 처음 사용했던 사천해전과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고 말하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라고 하며 장렬하게 전사한 노량해전 등 5폭의 해전도와 현자총통 등 무기가 전시돼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의 대부분을 제승당에서 썼다.

수루 뒤쪽 활쏘기를 연마하던 한산정에 서서 145m 거리의 과녁을 바라봤다. 밑에는 파도가 일렁인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바다 건너의 과녁을 향해 활을 쏘는 곳이다. 이순신은 밀물과 썰물 차이에 따른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이곳에 활터를 만들었다. 난중일기에는 이곳에서 떡과 막걸리로 내기를 걸고 활쏘기해서 배부르게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 통영의 어원은 삼도수군통제영

삼도수군통제영은 1604년 통영항 일대(당시 두룡포)로 본영을 옮겼다. 조선 수군의 총사령부였던 만큼 100여동의 방대한 건물이 세워졌고 군수물자 보급을 비롯해 나전칠기 등 공예 생산까지 담당했다. 통제영은 오랫동안 지역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했다. 통영이라는 도시 이름은 통제영의 줄임말에서 인용됐다.

통제영은 그러나 1895년 폐영되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됐다.

본영의 흔적은 당시 본관 건물이었던 세병관 등 일부만 남았다.

◇ 국립공원 100경中 최고, 한려수도의 비경

통영항으로 나온 뒤 날이 맑아 기회를 놓칠세라 바로 미륵산으로 향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정상까지 걸어 올라가는 계단에 적힌 '아재개그'가 흥미롭다. 국립공원 100경 중 최고를 자랑하는 한려수도의 풍광을 카메라에 양껏 담았다. 아주 맑은 날에 보인다는 지리산 천왕봉, 일본 대마도까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상 쪽 전망대 근처에 붉은 표지판 하나가 눈에 띈다.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말은 1950년 8월 감행됐던 통영상륙작전에서 유래됐단다. 당시 뉴욕헤럴드트리뷴에서 파견된 여성 종군기자 마거릿 허긴스가 해병의 활약상을 보고 '그들은 마치 악마도 잡을 수 있을 듯했다'고 표현했고, 국내 신문이 이를 귀신 잡는 해병으로 옮기면서 대표적인 수식어가 됐다.

◇ 동양의 몽마르트르…동양 최초의 해저터널

통영 강구안 항구 동쪽 언덕 달동네를 동피랑이라고 한다. 동피랑은 '동쪽'과 '비랑'이라는 말이 합쳐져서 생겨났다. 비랑은 비탈의 지역 사투리다. 동피랑은 통제영 성곽의 동쪽 망루, 즉 동포루가 있던 자리였다. 이곳은 줄곧 서민들의 삶터였다.

통영시는 낙후된 마을을 철거해서 동포루를 복원하고 공원을 조성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2007년 시민단체들이 주민 의견을 조사한 끝에 공공미술을 통해 문화와 삶이 어우러지는 마을을 만들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후 직업 화가는 물론 미대생과 일반인까지 몰려 낡은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입소문이 나자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 관광명소가 됐고, 마을을 보존하자는 여론이 형성됐다. '동양의 몽마르트르'라는 애칭이 붙은 동피랑은 전국에 벽화마을 조성 붐을 일으켰다. 동피랑 마을 언덕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통영은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기도 한다. 드론을 띄워 보니 동피랑 마을의 지붕 색깔은 형형색색 색종이를 펼친듯하다.

항구 서쪽에 있는 쌍둥이 언덕인 서피랑은 99계단을 중심으로 시와 글귀가 새겨진 소박한 골목 분위기를 자아낸다. 통영 출신 시인 유치환·김춘수의 문학적 감성을 입힌 공간이라고 한다. 서피랑 꼭대기에 조용필의 가요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원곡이었다는 '돌아와요 충무항에'의 가사를 새긴 조형물이 이채롭다.

통영에는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이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2년 통영운하를 파면서 통영반도와 미륵도 사이에 조성됐다. 길이 480m, 폭 5m, 높이 3.5m 규모의 이 터널은 수심 13m 아래에 지어졌다. 1998년 통영대교가 건설되면서 보행자 통행만 가능해졌다. 걸어 들어가니 동굴 속으로 내려가듯 점점 기온이 낮아진다. 물 위로 배가 지나갈 때 뱃고동 소리도 들린다. 당항포해전에서 참패한 왜병들이 달아나다가 통영반도와 미륵도 사이 해협에서 많이 죽었는데, 일제는 조상들의 시체가 있던 곳 위를 지나갈 수 없다며 다리를 짓지 않고 터널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 통영, 예술과 문화가 파도치는 곳

통영 시내 건물의 한 벽화에는 '예술과 문화가 파도치는 곳'이라는 글귀가 있다. 이는 근거가 있는 말이다.

현대 음악의 거장 윤이상, 소설 '토지'의 박경리가 통영 출신이다. 청마 유치환과 저 유명한 '꽃'의 시인 김춘수, 통영의 피카소'라 불리는 화가 전혁림도 마찬가지다. 화가 이중섭의 주요 작품은 그가 2년간 머물렀던 통영에서 나왔다. 이 때문에 통영은 '예술가를 낳는 땅'이라는 수식어도 생겼다.

2002년부터 통영에서는 작곡가 윤이상을 기리기 위한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린다. 고향 통영을 사랑했던 윤이상은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뒤 옥살이하다가 서독으로 돌아갔지만, 다시는 한국으로 오지 못했다. 그가 타계한 지 23년 만인 2018년 3월 유해가 봉환돼 통영국제음악당 부지 내에 안장됐다. 앞서 2010년 통영 시내에 윤이상 기념관이 들어섰다. 기념관 서편에는 윤이상이 베를린에서 살던 집의 서재와 응접실 등을 그대로 재현한 베를린하우스가 있다.

미륵산 자락에는 박경리기념관과 묘소가 있다. 박경리는 2008년 5월 폐암으로 타계한 뒤 사랑했던 통영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영면했다.

항남동 거리에는 이중섭이 머물렀던 곳을 표시하는 표석이 있다. 낡은 건물 모퉁이에 다소 쓸쓸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었다. 이중섭은 6.25 전쟁 때 부산과 서귀포를 전전하면서 피란 생활을 하다가 1952년부터 1954년까지 통영에서 보냈다. 이 시기가 그의 '르네상스'였다. 이중섭은 이 기간 저 유명한 '황소', '흰소'. '달과 까마귀', '부부' 등의 한국 미술사에 큰 업적을 세운 많은 작품을 완성했다. '통영 앞바다', '통영 풍경' 등 통영의 모습들도 화폭에 담았다. 당시 그는 항남동 일대 다방에서 개인전을 열어 이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중섭은 다른 문학인들과 항남동의 선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향수를 달래기도 했다. 이중섭의 단골 술집과 개인전을 열었던 다방은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 도다리쑥국, 멍게비빔밥… 맛있는 건 다 있지(다찌)!

봄에 통영을 찾았다면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음식이 도다리쑥국이다. 통영의 봄철 대표 음식이다. 지역에서 해풍을 맞고 자란 쑥과 통통하게 살이 오른 자연산 도다리가 오로지 소금 간으로 기막힌 조화를 이룬다. 고단백 저지방 성분인 도다리는 4월에 가장 맛있다. 쑥의 향긋함이 도다리의 비린 맛을 없앤다. 도다리쑥국을 잘한다는 식당을 들렀다. 메뉴판에 적힌 가격은 '시가'다. 주인아주머니는 "얼른얼른 먹어야지, 좀 있으면 안 나와요"라고 귀띔한다.

통영 시내 식당 간판에서 자주 보이는 글귀가 '다찌'다. 다찌라는 말은 일본어에서 '서서 마시다'라는 뜻의 '다찌노미'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과거 통영항에서 일하던 어부나 노동자들이 바쁜 시간 중에 서서 가볍게 술을 마시던 것이 시간이 흐르며 푸짐한 안주 상차림으로 변했다는 분석이다. '술만 시키면 안주가 다 있지'라는 표현에서 '다 있지'가 경상도 억양의 영향으로 변형됐다는 해학적인 풀이도 있다.

다찌의 상차림은 정해진 메뉴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날그날 통영 앞바다에서 잡힌 제철 해산물이 상에 푸짐하게 오른다. 삶은 고구마나 옥수수, 멸치회무침 등 전채로 시작해서 광어, 도미, 멍게, 해삼, 미더덕, 산낙지, 굴 요리 등이 메인으로 나온다. 술을 추가하면 장어구이 등 안주의 급이 달라지기도 한다. 수소문해서 식당 한군데를 들렀다. 주인아주머니와 91세 노모가 운영한다. 노모가 주방에서 직접 전복을 다듬다가 웃으며 반긴다. 통영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볼락무김치가 먹기도 전에 군침을 돌게 한다. 보름에서 한 달간 숙성시킨 볼락의 단맛과 무의 시원함이 만나 청량하기 그지없는 데다가 비리지 않고 감칠맛이 난다. 주인아주머니는 삼배채굴을 '특별하게' 내놨다. 성인 손바닥만 한 크기다. 이 굴은 과학적인 처리로 씨를 없애 산란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여름에도 독성이 없고 탱글탱글한 식감을 유지한다. 입안에 꽉 차는 풍성한 육질이 일품이다. 각양각색 맛을 음미하면서 젓가락을 분주하게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멍게비빔밥이 나왔다. 국내에 유통되는 멍게는 70%가 통영산이다. 멍게 역시 봄이 제철이다. 지방질이 거의 없는 멍게는 해삼 등과 함께 대표적인 바다의 저열량 수산물로 손꼽힌다. 살을 다져 어간장으로 간을 한 뒤 이틀에서 1주일 정도 숙성시켜 비린 맛을 잡는다.

저물녘 강구안 문화광장에 앉아 달면서도 느끼하지 않은 통영 꿀빵과 충무김밥으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통영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이 봄이 다 가기 전에 가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도다리쑥국이 자취를 감추기 전에 '통영의 맛'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도록 말이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6년 5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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