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의래
| 2026-03-29 06:10:01
질서 밖 파편들로 다시 쓰는 역사…맨디 엘-사예 개인전
고서·민화·지도 등 시각 자료 결합…분류 체계 넘어선 이미지 실험
"차학경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스페이스K 서울서 6월 21일까지 전시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학교에서 학생의 이름을 가나다순으로 나열해 번호를 매기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장르별로 구분해 꽂는 일은 '질서'를 만드는 가장 익숙한 방식이다. 하지만 '질서' 속에서 관계와 맥락은 사라진다.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이주해 활동하는 작가 맨디 엘-사예(41)는 이처럼 정돈된 체계 바깥에 남겨진 지점에 주목한다. 분류의 편리함 뒤에 가려진 개인의 기억과 서사를 환기한다.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어머니와 팔레스타인계 아버지를 둔 작가는 밀려난 파편들을 다시 불러 모아 다문화와 이주민이라는 비주류 위치에서 형성된 시선으로 또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을 펼쳐 보인다.
서울 마곡동 스페이스K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엘-사예의 개인전 '테레사 이후'(For Theresa)에는 그의 신작 9점을 포함해 30여 점의 작품이 소개된다. 그는 자료 수집과 편집을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제도와 분류 체계가 무엇을 선택하고 배제하는지를 질문해 왔다.
이번 전시를 위해 한국을 찾은 작가는 "무언가 지워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이를 보존하고 싶은 마음에서 작업이 시작된다"며 "내 작업은 재료도 풍부하고 해석의 여지도 많지만, 그 시작에는 결핍의 정서가 있다"고 설명했다.
신작인 '세계의 명화' 연작은 다층적인 언어 실험을 시각적 이미지로 확장한 작업이다.
작가는 한국의 한 고서점에서 '세계의 명화'라는 책을 발견했다. 표지에는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 이미지가 담겨 있었다. 프랑스 신고전주의 회화의 대표작이 한국 헌책방까지 유입된 것을 보며 서구 중심 미술사에 내재한 위계 구조를 떠올렸다.
그는 책 표지를 실크스크린으로 옮기고, 한국 벼룩시장 인쇄물과 조선 민화, 책가도, 고지도, 독립신문 등의 이미지를 겹쳐 쌓은 뒤 격자무늬를 덧입혀 화면을 구성했다.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의 요소가 한 화면에서 교차하며 기존의 의미 체계를 뒤흔든다.
작가는 "내 작품에서는 텍스트도 색채처럼 다루고 물질적 요소로 기능한다"며 "'트로이의 목마'처럼 역사적 파편들을 예술이라는 형식 안에 숨겨 들여온다"고 설명했다.
이 작업은 한국계 미국인 예술가 차학경(1951∼1982)과도 맞닿아 있다. 전시 제목의 '테레사'(Theresa)는 차학경의 영어 이름이다.
차학경의 유작 소설 '딕테'는 다양한 사진과 글을 통해 유관순, 잔 다르크, 성녀 테레즈, 그리스 신화 속 뮤즈들, 작가 자신 등의 삶을 복잡하게 교차시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품이다.
여러 언어와 기억의 조각을 엮어 서사를 구축했던 차학경의 방식처럼, 작가도 이미지의 파편을 재배열해 새로운 이미지를 구성한다.
작가는 "이번 전시는 차학경에게 보내는 하나의 러브레터"라며 "이 나라(한국)의 역사와 그 안의 균열에 말을 거는 작업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서재 공간'은 제목 그대로 작가가 전시장 안에 서재처럼 마련한 곳이다.
한편에는 한국 전통 민화 '책가도'를 참조한 책장을 만들었다. 지도, 의학, 예술 등 작가의 관심사가 담긴 다양한 분야의 자료를 배치했다. 지식이 선택되고 배열되는 과정과 학문에 대한 열망, 기물 수집의 욕망을 엿볼 수 있다.
또 다른 편에는 유리 진열장 작업인 '체화작용'을 설치했다. 전시 준비 과정에서 사용된 사적 기록과 오브제를 함께 배치해 일상의 사물이 예술의 맥락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작가는 "사람들이 머물고 싶고, 실제로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며 "직설적이고 대립적인 면이 있지만 동시에 관객에게 생각할 여백을 주는 곳"이라고 밝혔다.
전시 공간 전반에 등장하는 '넷-그리드'(Net-Grid)는 작가의 대표 연작이다.
수집한 이미지와 텍스트를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한 뒤, 화면 위에 격자를 덧입혀 질서와 구조를 만든다. 이 격자는 정보를 정리하는 틀이면서 동시에 실체를 가리는 장치로 기능하며, 기록의 이면에 숨겨진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이 밖에도 서구 미술사의 대표 이미지와 한글 텍스트를 결합한 작업, 라텍스를 활용해 신체의 흔적과 시간의 흐름을 포착한 설치 등도 소개된다. 바닥 전체를 덮은 라텍스 작업은 전시장을 하나의 '피부'처럼 만든다.
엘-사예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학교를 나와 런던 왕립예술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작품은 영국 테이트 재단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샤르자 미술재단 등에 소장돼 있다.
작가는 "전시 전체를 마치 한 점의 회화처럼 조화롭게 구성해서, 관객들이 고양된 차원 속에서 깊이 있는 공간감을 경험할 수 있게 설계했다"며 "관객들이 작품 앞에 오래 머물며 하나의 '증언'처럼 경험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6월 2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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