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코리안] "고려극장은 강제 이주 역사·민족문화 지켜온 심장"

카자흐스탄 국립 아카데미 고려극장 이 류보비 예술감독 인터뷰
내년 강제 이주 90주년·극장 창립 95주년 맞아 연극 '기억' 순회공연 추진
"피땀으로 아리랑 지켜낸 최장수 한민족 극단…대등한

박현수

| 2026-08-04 06:00:07

▲ 이 류보비 카자흐스탄 국립 아카데미 고려극장 예술감독 [고려극장 제공]
▲ 고려극장 방문한 당시 문재인 대통령 내외와 함께 기념촬영한 이 류보비 (알마티=연합뉴스) 배재만 기자 = 2019년 4월 21일 카자흐스탄을 순방한 당시 문재인(앞줄 오른쪽서 6번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국립아카데미 고려극장에서 강제이주 관련 '기억'을 관람한 뒤 정문에 걸려 있는 한글 현판 앞에서 이 류보비(앞줄 오른쪽서 5번째) 당시 극장장 등 관련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19.4.21. scoop@yna.co.kr
▲ 2006년 고려극장을 방문한 당시 한명숙(왼쪽서 3번째) 총리와 이 류보비 극장장 [고려극장 제공]
▲ 고려극장 방문한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카자흐스탄 대통령과 이 극장장 [고려극장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러시아어 강제 사용 정책 속에서도 우리 고려극장은 아리랑을 부르며 한민족의 영혼을 지켜냈습니다. 95년 역사를 이어온 이 무대는 단순한 극장이 아니라, 중앙아시아 고려인 사회의 정체성이자 모국을 향한 그리움 그 자체입니다."

이 류보비(74) 카자흐스탄 국립 아카데미 고려극장 예술감독은 최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내년 고려인 강제 이주 90주년과 극장 창립 95주년을 맞이하는 소회를 이같이 밝혔다.

1932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립된 고려극장은 현재 카자흐스탄 최대 도시 알마티 도심에 자리 잡고 있다. 한반도 안팎에서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온 한민족 공연단체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 끄질오르다를 거쳐 알마티에 정착하기까지, 고려극장은 숱한 역사의 굴곡 속에서도 민족의 언어와 문화유산을 지켜낸 거점이었다. 지금까지 '춘향전', '심청전' 등 300편이 넘는 연극을 무대에 올렸으며,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이 경비로 일하며 말년을 보낸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1997년부터 20년 넘게 극장장을 지낸 뒤 현재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이 감독은 카자흐스탄 공훈예술인이자 주르겐오프 카자흐 국립예술아카데미 명예교수,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 이사를 겸임하고 있는 고려극장의 산증인이다. 2016년 '도스틱' 2등급 훈장과 독립국가연합(CIS) 방위단체 국제연합 공로 훈장을 수훈했다. 다음은 이 감독과의 일문일답.

-- 내년 고려인 강제 이주 90주년과 고려극장 창립 95주년을 맞아 준비 중인 대표 행사는.

▲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연극 '기억(Память)'의 지역 순회공연이다. 이 작품은 1937년 강제 이주부터 현재까지 카자흐스탄 고려인의 역사를 다룬 유일한 역사극이다. 1997년 이주 60주년을 기념해 초연됐고, 10년 전 한 차례 더 무대에 올랐다. 최근 84세의 수석 연출가가 지난 10년간의 역사를 새로 집필해 90주년 판을 완성했다. 내년에 아스타나, 카라간다, 악타우 등 주요 도시를 돌며 순회공연을 펼칠 예정이다.

-- 또 다른 기념행사 계획은 어떤 것들이 있나.

▲ 내년 3월 카자흐스탄의 최대 민족 명절인 '나우르즈' 시기에 맞춰 대규모 플래시몹을 준비하고 있다. 나우르즈는 카자흐스탄에서 한국의 설날에 해당하는 국가 명절이다. 문화센터를 보유한 전국 16개 도시에서 동시에 플래시몹을 진행하고 이를 TV로 생중계해 카자흐스탄이 다민족 통합 국가라는 점을 대내외에 알릴 구상이다. 매년 극장에서 열어온 설날 행사도 전국 규모로 확대하고, 주카자흐스탄 한국대사관·영사관·한국문화원과 함께해 온 한국문화축제도 한층 강화할 계획이다. 아울러 한국의 극단이나 배우를 초청해 고려극장 배우들과 함께 무대에 서는 한·카 합동 공연도 구상하고 있다. 5월 1일 카자흐스탄 민족통합의 날 등 국가 기념일에도 90주년 관련 프로그램을 연계해 운영할 계획이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카자흐스탄이 독립하면서 CIS 각국에 민족주의가 대두해 소수민족인 고려인의 처지가 어려워졌다. 고려극장 역시 국가 지원이 끊겨 심각한 운영난에 빠졌으나, 1991년 알마티 한국교육원 개원과 이듬해 주카자흐스탄 한국대사관 개설을 계기로 반전의 기회를 맞았다. 1992년 한국 국립극단과 자매결연을 하여 단원들의 모국 연수가 시작됐고, 한국 정부와 기업들의 후원도 이어졌다.

-- 고려극장의 현재 운영 상황과 위상은 어떠한가.

▲ 1997년 부임 당시에는 경제 위기와 급여 체불로 젊은 배우들이 대거 떠나 전문 배우가 6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현재는 배우의 90%가 연극을 전공한 젊은 전문 인력으로 교체됐고, 전체 정원도 100명으로 늘었다. 레퍼토리를 현대화하고 극장을 도심 중앙으로 이전한 것이 관객 증가의 핵심 요인이다. 공연 레퍼토리는 고려인 관련 작품이 40%, 러시아·소련 시대의 다민족 작품이 60%를 차지한다. 고려극장은 카자흐스탄 정부가 공인한 유일한 국립 고려인 극장으로, 카자흐스탄을 방문하는 양국 정상과 주요 인사들이 반드시 들르는 국가적 상징 기관이다.

-- K-컬처의 확산 속에서 현지 분위기와 모국과의 협력에 대해 평가한다면.

▲ 카자흐스탄에서 K-팝과 K-드라마, K-푸드는 이미 일상 깊숙이 자리 잡았다. 제품 바코드 앞자리 '880'은 현지에서 한국산 고품질 제품을 보증하는 신뢰의 상징이다. 고려극장의 유지와 발전에는 카자흐스탄 정부뿐만 아니라 역사적 모국인 한국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과 관심이 큰 힘이 되었다. 매일 많은 한국인 방문객이 극장을 찾아주시는 것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는 큰 정서적 위안이 되며, 양국이 깊은 문화적 유대감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실감한다.

-- 한국 사회나 국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아쉬움이나 당부의 말이 있다면.

▲ 솔직히 말하면 한국 방문 시 일부 석상에서 언어가 서툴다거나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은근한 배타적 시선이나 스노비즘(엘리트 의식)을 느낀 적이 있다. 반면 우리는 알마티 그린바자르 등에서 한국인 관광객이 어려움을 겪으면 적극적으로 다가가 돕는다. 그것이 한 핏줄이라는 동포 의식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중장년층은 고려인의 역사를 잘 알고 있지만, 젊은 세대는 강제 이주의 역사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많아 상호 이해를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본다.

-- 고려극장이 어떤 평가를 받기를 바라나.

▲ 고려극장의 배우와 단원들은 높은 급여나 좋은 처우 때문이 아니라, 오직 민족 문화를 보존하겠다는 사명감 하나로 무대에 서고 있다. 한국 사회가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을 단순한 수혜 대상이 아닌, 척박한 환경에서 95년간 한민족의 문화 자산을 지켜낸 대등한 문화 파트너로 바라봐주길 바란다. 우리가 걸어온 피땀 어린 길을 숭고한 역사적 현상으로 인정해 주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18년간 '슈콜라(초·중·고교)' 역사 선생님으로 일한 경력도 있는 이 감독은 "연해주에선 할아버지가 당시로선 드문 러시아어 교사여서 살림살이가 넉넉했지만, 강제 이주로 살림살이가 궁핍해졌으며, 아버지가 목수 일로 근근이 생계를 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감독은 "강제 이주는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비극"이라며 "특히 이주 후 한국어 학교, 신문 등이 모두 폐쇄되는 바람에 고국과의 '끈'이 단절돼버린 것이 가장 아쉬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한국인이란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아왔다"고 덧붙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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