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의래
| 2025-10-12 06:01:03
완벽 속의 오류, 시간의 틀을 흔들다…강주리 개인전 '무향시간'
펜 드로잉·한지 작업 등 12점 소개…스페이스 윌링앤딜링서 11월 2일까지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가로로 7개, 세로로 3개씩 21개의 종이패널이 이어져 있다. 패널마다 펜을 사용한 각종 동물 그림이 그려져 있다. 각각의 패널은 독립된 작품이면서도 함께 거대한 하나의 화면을 이룬다.
양쪽 끝은 물리적으로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 연결돼 순환 구조를 이룬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21개 패널 중 일부는 순서가 바뀌어 있거나 위아래가 뒤집혀 있다.
지난 10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 강주리(43)는 2025년 작 '기라성'에 대해 "무향시간이라는 전시 제목처럼 시간이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지 않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며 "21개 패널이 하나의 큰 그림으로 완성된 구조 안에 의도적으로 오류를 넣어 해방감을 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종이와 펜이라는 드로잉의 기본 재료를 중심으로 회화와 설치 작업을 꾸준히 이어오는 작가 강주리의 개인전 '무향시간'이 서울 창성동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열리고 있다. 신작을 중심으로 12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작가는 주로 펜으로 '크로스 해칭' 기법을 사용해 그림을 그린다. 얇은 선을 그물처럼 교차해 면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작가는 어린 시절 전문적인 바둑 교육을 받았는데, 마치 수많은 바둑판들이 모여 그림으로 탄생한 것 같다.
2025년 작 '무리 1'은 크로싱 해칭 기법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색연필과 펜으로 무리 지어 누워 있는 바다사자들을 그린 작품이다. 바다사자들의 경계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보랏빛 돌무더기나 뭉게구름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바다사자들의 얼굴과 형태가 드러난다.
작가는 "우주에서 지구를 보면 그냥 파란 구슬 하나로 보이지만 가까이 오면 그 안에 있는 온갖 다양한 것들이 있는 것처럼 멀리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가까이 오면 형상이 보이는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가는 주로 펜으로 작업해 왔지만, 최근에는 종이 자체에 관심을 두고 있다. 2024년부터 전주에서 한지 장인들과 종이 제작 과정을 경험하며, 종이가 단순한 회화의 바탕이 아닌 시간과 행위가 응축된 결과물임을 인식했다.
전통 한지에서는 종이를 뜨는 과정에서 구김이 생기거나 불순물이 섞이면 완제품으로서의 가치를 잃은 '오류'로 여긴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오류의 우연성에 주목했다.
2025년 작 '현자의 돌을 찾기 위한 의식'은 이런 오류의 과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종이 제작 과정에서 닥나무 잎이라는 이물질을 넣고 문질러 종이 표면에 닥나무잎 무늬가 새겨지게 했다.
작가는 "종이를 만드는 완벽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오류를 만들어 즉흥성과 우연성, 자유로움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가는 미국 터프츠대 보스턴미술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지난 10여년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2012년 미국 매사추세츠 문화부 아티스트상을 받았고 2023년에는 영국 글렌피딕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 한국 대표로 선정됐다. 아모레퍼시픽 설화수, 삼성 더 프레임 TV, 홍콩 미라마 쇼핑센터 등과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전시는 11월 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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