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정
| 2026-06-08 02:04:32
[르포] "팬데믹 때 '사랑의 불시착'을 보면서 K-드라마에 빠졌어요"
아르헨 K-드라마 팬들 "문화는 달라도 보편적 감정은 같아"
배우 이민호 팬들 "한국어·한식 배우고 한국에도 갔어요"
(부에노스아이레스=연합뉴스) 김선정 통신원 = "팬데믹 때 우연히 '사랑의 불시착'을 봤는데, 그때부터 K-드라마 마니아가 됐죠."
짙은 안개가 도시를 뒤덮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카바지토 지역의 한 K-치킨 식당.
6일(현지시간) 이곳에서는 K-드라마 팬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국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첫 '수다모임'이 열렸다.
10대 청소년부터 60대 장년층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참가자들이 모였다. 곧 한국 여행을 간다는 남편과 함께 온 여성, 어머니와 동행한 딸, 이민호 팬클럽 회원 등 사연도 제각각이었다.
서로 처음 만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어색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자연스럽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와 배우 이야기가 이어졌고, 식당 안은 금세 웃음소리와 수다로 가득 찼다.
이번 모임을 기획한 현지 교민 김선주 씨는 한국 드라마 팬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그는 "얼마 전 70대 점잖은 신사가 식당을 찾아와 휴대전화를 보여줬는데, 거기에 한국 드라마 제목이 100여개 가까이 적혀 있었다"며 "드라마 OST까지 정리해 놓고 자신을 한국 드라마 팬이라고 소개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현지 라디오 인터뷰에서도 진행자가 제게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무엇을 궁금해하느냐고 물었는데 사실 질문은 안 하고 '나는 이 드라마를 봤다', '저 배우를 좋아한다'며 한국 드라마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려줬다"고 웃었다.
그는 "팬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할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이번 모임을 준비했다"고 덧붙였다.
참가자들의 한국 드라마 입문 계기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
여러 참가자가 공통으로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넷플릭스에서 우연히 '사랑의 불시착'을 봤는데 이후 완전히 빠져들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참가자는 "처음에는 K-pop을 좋아해서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가졌는데, 나중에는 드라마를 더 많이 보게 됐다"며 "지금은 새로운 작품이 나오면 바로 시청한다"고 말했다.
특히 배우 이민호는 여러 참가자가 공통으로 언급한 스타였다.
베티는 "'더 킹: 영원의 군주'를 보고 이민호를 알게 됐고, 이후 '꽃보다 남자'까지 보면서 완전한 팬이 됐다"며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한국 음식을 직접 만들게 됐으며 결국 팬 미팅을 보기 위해 한국까지 여행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남편을 보내고 힘들었는데, 한국 드라마를 보고 이민호 배우를 좋아하게 되면서 내 인생도 바뀌었다"라며 "이민호 배우가 아르헨티나를 한번 방문해 주면 좋겠다"고 희망을 피력했다.
팬들은 한국 드라마만의 매력으로 사람 사이의 관계와 정서를 꼽았다.
14년 전부터 베네수엘라 국영 TV에서 한국 드라마를 봤다는 레이시는 "한국 드라마에는 노인이나 장애인을 존중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며 "주인공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도 세심하게 다뤄져서 좋다"고 말했다.
베이트리스는 "문화는 많이 다르나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은 같다"며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과정을 천천히 보여주고 마지막에는 행복하게 끝나는 작품이 많다"며 "그런 순수한 사랑 이야기가 아름답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날 가장 많이 언급된 작품 가운데는 '사랑의 불시착' 외에도 '꽃보다 남자',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미스터 션샤인', '응답하라 1988', '슬기로운 의사생활' 등이 있었다.
한 참가자는 "'응답하라 1988'처럼 이웃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나 '슬기로운 의사생활'처럼 사람들이 우정을 나누는 드라마가 좋다"며 "극적인 사건보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작품이 더 마음에 남는다"고 말했다.
참가자 중에는 한국 사회를 연구하게 된 경우도 있었다.
마르타는 "처음에는 스토리가 흥미로워서 보기 시작했지만, 점점 한국 사회 자체에 관심이 생겼다"며 "드라마를 통해 보이는 경쟁 풍토와 인간관계를 연구하면서 한국의 높은 자살률 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주최 측이 준비한 한국산 마스크 시트를 선물로 받았다.
테이블 위에는 빼빼로와 오란다 과자, 한국식 커피믹스가 놓였고 참가자들은 간식을 나눠 먹으며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 장면과 배우, OST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모임이 끝날 무렵에도 쉽게 자리를 뜨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 만난 참가자들은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며 다음 모임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한 참가자는 "오늘은 마치 오래된 친구들을 만난 것 같았다"며 "다음 모임이 벌써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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